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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경천동지가 아니다. (윤창화/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 금강신문)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3.10.22|조회수26 목록 댓글 0

깨달음 오해하는 이 많아
불가사의 힘ㆍ별세계 아닌
참된 의미 받아들여야

 

‘깨달음’이란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寂滅), 탐(貪)·진(瞋)·치(癡) 등 세속적인 욕망이 사라지고 지혜와 자비만 남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깨달은 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수행자, 특히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 수행자 가운데는 종종 깨달음이라는 것을 착각하고 오인하여, 깨달으면 불노불사, 축지법 등 신체적인 불가사의함을 얻게 된다거나 또는 미래를 손바닥 보듯 훤히 내다보는 신통력을 얻어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별세계가 나타날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착각하는 병폐가 과거에도 심했던 것인지, 근대의 대표적 선승 한암선사(漢岩, 1876-1951)는 [일진화(一塵話)]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참선공부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

“대저 ‘참선(參禪)’이라는 것은 경군동중(驚群動衆, 대중을 깜짝 놀라게 하고 요동치게 하는)하는 별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현전일념(現前一念, 즉 지금 한 생각=망념)이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요달(了達)하여 다시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馳驅心, 즉 욕망)이 없어, 일체 경계를 대(對)함에 부동함은 태산 반석과 같고, 청정하고 광대함은 태허공과 같아서(空을 뜻함), 모든 인연법을 수순(隨順, 따름)하되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어야 한다(생략)”

한암선사는 종정(宗正)을 네 번 역임한 분이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27년 동안 거의 두문불출로 일관했던 철저한 간화선 수행자였지만, 절대 깨달음에 대해 과대 포장도, 과잉해석도 하지 않았다. 깨달음이란 마음의 변화로 욕망 등 번뇌 망상이 사라져서 마음이 외풍에 움직이지 않는 것일 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경천동지(驚天動地) 등 과대 포장을 철저하게 경계했는데 그것은 언어의 과장법이나 갓 참선을 시작한 초심자의 허풍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깨달음의 경지’라고 한다면 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부처님의 경지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탐·진·치를 비롯한 세속적 번뇌가 사라진 것을 열반 즉 ‘깨달음’이라고 하셨고, ‘연기(緣起),’ ‘무상,’ ‘무아(無我)의 이치,’ ‘사제(四諦),’ ‘중도의 이치’를 터득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셨다. 조금의 과대 포장이나 과잉 표현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후대에 들어서는, 깨달음의 경지가 얕은 수행자일수록 과대 포장이 심하여 마치 깨달으면 경천동지, 신출귀몰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곧 별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것은 당사자가 진실한 깨달음, 순도 100%의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거나 또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보고자 하는 편법일 것이다. 이는 잘못하면 많은 사람들을 혼동하게 하는 망언 중의 망언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선(禪)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이란 번뇌 망상이 일어났다가(生) 사라지는 것(死), 즉 ‘번뇌 망상의 기멸(起滅)로부터 해탈을 가리킴을 에둘러 표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언어의 표면적인 뜻에 매달려, 정말로 이 육신 그대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혹은 죽고 사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혼동,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정혜쌍수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에 대한 학문적 교리적인 기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문제는 정견(正見)이 아닌 잘못된 견해를 수정하려고 하지 않고, 깨달음에 대한 어설픈 안목, 정확도가 떨어지는 안목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금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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