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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청주 심우선원 금강경법회(3) (7월 20일) 강의안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3.07.22|조회수51 목록 댓글 0

심우선원 금강경법회 셋째 시간 강의안입니다.

 

금강경 공부(3)

경전본문 - 제4품 묘행무주분, 제5품 여리실견분

(주제 - 미혹으로 이끄는 보시와 깨달음으로 이끄는 보시)

 

차례

1) 말하는 사람의 장애

2) 보시하는 사람의 장애

3) 해탈과 자비를 가져오는 보시

 

 

1) 말하는 사람의 장애

최근 정가에서는 막말로 인해 어수선합니다. 한 정치인은 대통령을 당신으로 하대해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국회의원은 심지어 귀태(鬼胎)로까지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런 말을 할까 그 말한 사람의 입장을 생각할 관용도 필요합니다. 분노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상대방이 제공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모두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온 충정이겠지만, 불자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부처님이 바른 생각(正思)과 바른 말(正語)을 특히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팔정도에는 바른 견해(正見) 다음에 나오는 것이 곧 바른 생각과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위(正行)입니다. 험한 말과 독한 생각이 과연 민주주의를 가져오는지 불자로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법적인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이미 경험했습니다. 겉으로는 법적인 요건을 갖추었더라도, 위선과 기만의 정치는 언제라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돌아보면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는 사람이 어느 순간 독한 말을 하는 경우를 목격합니다. 그동안 미움과 분노를 감추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독한 말을 쏟아내면 후련합니다. 이것을 보면 독한 말을 하면 쾌락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고, 참는 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은 흔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왜 참는 일이 고통일까요?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은 불자로서 자신을 관찰하는 중요한 수행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악한 말이 도덕적이지 못하며 남에게 비난받을 일인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분노나 독한 말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험한 말을 합니다. 불바다를 만들겠다거나 천번 만번 복수를 하겠다는 막말은 북한정권이 늘 쓰는 정치언어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분노나 험한 말을 마음속에 감춥니다. 이 과정은 인내와 인위적인 억압의 과정입니다. 남의 비난을 사고 싶지 않아서 감추는 경우도 있고, 상대방이 받은 상처를 생각해서 참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경우든 인내와 고통을 수반합니다. 우리 불자의 마음공부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남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반격을 하면 쾌락이 일어나지만, 상대방이 강하거나 자신의 입장이 앙갚음을 하지 못할 상황이면, 좌절과 슬픔, 원한이 일어납니다. 불교의 수행은 분노가 일어날 때 일어나는 마음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처음에는 어렵지만, 참고 바라보다 보면, 자신의 마음 속 분노의 원인과 그 성격을 이해하게 됩니다. 상처와 미움의 악순환은 이런 과정을 통해 사라집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미움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으면 마침내 미움이 가라앉으리라.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위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

다른 사람 책망하기를 좋아하지 말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기에 힘써라. 이렇게 자신을 알면 모든 근심은 영원히 사라진다. (법구경 1장)

 

자신의 분노 속을 깊이 관찰하면 무엇이 보일까요? 사람이 남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는 대개 그 사람의 소유가 탐이 나서 빼앗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권력이나 재물을 얻을 기회가 남에게 돌아가는 것을 볼 때도 시기 질투 미움이 일어납니다. 이 속에는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마음에서 나옵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깊이 관찰하고 사색하라고 주문합니다. 관찰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止)와 관(觀)은 불교수행의 큰 두 축입니다.

 

 
2) 보시하는 사람의 장애

세상의 무상을 관찰하며 이 세상에 과연 내 것이나 나라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불교의 마음공부입니다. 이것은 세상만사 모두 양보하고 죽은 듯이 살라는 처세의 문제가 아닙니다. 흔히 불교를 이렇게 잘못 오해하는 일이 많습니다. 불교는 인생의 존재의 근본을 심각하게 묻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실상을 관찰하여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사는 길을 가르칩니다. 무아(無我)의 무상(無常)의 진리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속의 원한과 미움을 쉬는 것이 불교의 수행입니다.

보시의 경우도 같습니다. 보시를 하는 마음속을 깊이 바라보라고 금강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선행을 해서 남의 존경을 바라는 마음이나 복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마음은 보시하는 행위 속에 감추어진 생각(관념)입니다. 이 마음은 쉽게 원한과 질투로 바뀝니다. 봉사나 보시를 열심히 한 사람이 나중에 자신에게 재앙이 다가오면 부처님이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심지어 보시를 받는 사람이 불손한 태도를 취하거나 자신의 선의를 몰라줄 때도 분노와 미움이 일어납니다.

 

이기적인 집착이 없이 보시를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사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도 원한을 품지 않고 사는 만큼 어려운 길입니다. 수행은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본질을 보고 세상의 미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주는 물건이 비싸거나 귀한 것일 때는 자기의 중요한 소유를 떼 준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이 귀하니, 내 것을 내 놓은 보시물도 귀하다는 생각이지요. 금강경 제4 묘행무주분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귀한 것을 준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면, 그 보시는 과연 옳은 보시일까요?

이 물음을 한 동안 깊이 사색하시길 바랍니다. 보시라는 아름다운 행위 속에 감추어진 그 실상은 무엇인가? 보시하는 마음속을 살피는 일은 곧 불교만이 세상에 주는 심오한 수행입니다.

 

 

3) 보시는 해탈과 자비의 수행이다

보시를 하면서 부처님이나 전륜성왕과 같이 복을 많이 받고 온 집안이 왕족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마음이 있다면 과연 그 마음은 집착의 마음일까요, 아니면 진실로 나와 남을 행복하게 하는 길일까요? 부처님의 놀라운 가르침은 계속 이어집니다.

 

“수보리여,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32상은 인간이 여러 생에 걸쳐 수많은 보살행을 해서 얻은 공덕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신에게 있는 32가지 복덕상도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의 몸에 있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덕도 모두 헛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성인이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 또 어떤 사람이 있을까요?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주는 물건도 모두 실답지 않은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은 존재의 실상을 이해하는 것이 금강경이 가르치는 대승보살의 마음공부입니다. 보시하는 자기 마음을 깊이 바라볼 때, 놀랍게도 32가지 상을 구하는 생각이 곧 내 것에 대한 집착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보시하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교만과 아집을 깨닫는 것이 바로 금강경이 전하는 참다운 깨달음입니다. 교만과 아집의 미혹은 이 세상의 모든 법(法 존재)이 모두 공(空)하며 내가 없는 무아(無我)의 도리를 기억하고 깊이 새길 때 사라집니다. 보살이 이렇게 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옛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언제 천지가 개벽하여 세상 사람이 다 잘 사는 때가 올까요?”

“네 이웃이 형제로 보일 때 개벽이 온다.

 

형제는 너와 나의 체면이나 물질을 따지지 않는 사이입니다. 이처럼 교만과 복덕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 너와 내가 따로 없는 보시를 무주상(無住相)보시라고 합니다. 무주상보시는 보시하는 사람이 교만과 욕망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이 갖기 쉬운 마음의 두려움과 짐을 벗어놓게 합니다.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남한으로 탈출한 북한주민들이 다시 입북하는 예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특수한 임무를 띠고 온 공작원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별문제이겠지만, 혹여나 남한에서 지내기가 어려워 다시 입북했다면 우리 사회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통일은 먼저 남한에 있는 탈북인들이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탈북인들이 사는 것을 본 북한주민들이 진심으로 통일을 바랄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이 진심으로 우정을 느낄 수 있도록 주는 보시가 불교의 보시입니다. 받는 사람도 두려움과 짐을 벗어 해탈에 대한 환희심을 내게 합니다.

 

불교는 스스로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자리이타의 종교입니다. 보시하는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관찰수행은 금강경의 부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 속에는 만법이 공한 진리가 숨쉬고 있습니다. 끝으로 무주상보시에 대한 야부선사의 게송을 소개하며 법회를 마칩니다.

 

야부 若要天下行인댄 無過一藝强이니라

        만약 천하에서 유행하고자 하면 한 가지 재주를 뛰어나게 할지니라.

 

야부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로다 欲知端的意인덴 北斗面南看하라

        虛空不閡(애)絲毫念하니 所以彰名大覺仙이라하노라

서천 열 무늬 비단(十樣錦)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도다.

분명한 뜻을 알고자 하면

북두칠성을 남쪽을 향해 볼지어다.

허공은 털끝만한 생각도 거리끼지 않으니

이 까닭에 대각선(大覺仙)이라 부르는 도다.

- 금강경오가해 야부송

 

 

여운 김광하 합장,
 

 

 

첨부파일 심우선원-금강경공부(3)(2013년7월20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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