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청주의 한 선원에서 금강경 법문을 한다. 지난 6월 법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한 노보살님이 내 손목을 끌고 골목으로 데려 가셨다. 약간 겸연쩍은 얼굴로 ‘노숙자 떡 해주는데 보태세요.’라고 말하며 내 손에 봉투를 쥐어주셨다. 보살님은 자주 법회에 참석하는 분이라 얼굴이 익은 분이다.
보살님은, 내가 알기로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고 지금도 일을 하는 분이시다. 나중에 보니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지난 7월에도 이 보살님은 같은 금액을 내게 주셨다. 내가 회계보고서 작성을 위해 성함을 물어보자 한사코 손사래를 치신다. 어렵게 번 돈을 내 놓는 보살님을 보면서, 더 많이 가진 내 자신의 모습이 무겁게 느껴졌다.
보시란 남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 즉 자기의 소유를 남과 나누는 일이다. 그러나 불교의 보시는 어려운 사람과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행이다. 어떻게 하면 보시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 될까? 금강경은 보시의 조건에 대해 부처님의 따끔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부처님은 보시를 하더라도 네 가지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했다.
첫째, 내가 준다는 생각(아상 我相)을 버려야 한다. 둘째, 복을 심었으므로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생각(인상 人相)을 버려야 한다. 셋째, 내 선물을 받은 대상에 대한 생각(衆生相)을 버려야 한다. 넷째, 보시한 덕으로 내 목숨(또는 영혼)이 오래 지속되리라는 생각(壽者相)을 버려야 한다.
이 네 가지 생각은 고대 인도인들의 윤회관에서 나온 관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에게도 복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부처님은 이 네 가지 생각은 깨달음을 가로막는 망상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생각이 있어서는 세상이 무상하고 내가 없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푸는 자가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남을 돕는 보시가 오히려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키울 수 있다는 부처님의 경책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진실한 가르침이다.
자선단체에서 활동하다 보면, 세상의 칭송을 받는 일이 자주 생긴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오만해지기 쉽다.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는 그런 마음이 없었지만, 어느덧 자신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봉사단체의 대표가 마치 기업의 총수처럼 행세하는 것도 보았고, 명예를 바라다 마침내 집착이 되어 국제적인 상을 받으러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종교인의 보시는 기업체나 정부의 ‘영세민 돕기’와는 근본이 다르다. 기업체나 정부는 실적이 중요할지 몰라도 종교인의 보시는 무엇보다 자신을 비우는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은 거창하게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우리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라는 망상을 비우라고 가르쳤고, 급기야 불교란 이름마저도 내려놓으라고 했다. 세상이 텅 비어있음을 가르치는 불교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거나 자아를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미망은 도덕적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아닐까?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한상봉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의 글을 감동깊게 읽었다.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살던 마누엘 신부는 어느 날 스스로 이렇게 물었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어도 이처럼 살았을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살았을까? 만일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령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나의 투신과 신앙은 불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침내 사제복을 벗고, 그리스도교 신앙마저 포기한 채 무신론자로서 남은 생애를 빈민촌에서 살았다.
마누엘 신부는 죽기 전에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주님, 제가 무신론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누엘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지난 2012년 3월 세상을 떠난 허병섭 목사님이 떠올랐다. 목사님은 한국신학대학을 나와 빈민목회를 한 분이다. 청계천 일대의 꼬방동네가 철거되자 허 목사는 성북구의 달동네로 들어가 교회(동월교회)를 차렸다. 고인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며 목사직마저 반납했다. 한국 기독교장로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목사직을 반납하고 허병섭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와 빈민들과 함께 싸우다 구속돼도, 경찰이 노동자에게는 거친 언행을 퍼부으면서도 목사에게는 존칭을 쓰며 대접하는 것이 죄스럽고 괴로웠다.”
마누엘 신부나 허병섭 목사를 보면 그 분들의 겸손한 비움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 분들은 목사나 사제직 자체가 장애라고 생각하기보다, 목사나 사제직에게 주어지는 대접이나 도덕적 정당성이 이웃과 진정한 교류를 막는 장애임을 깨달은 분들이 아닐까.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유마경에서도 볼 수 있다. 유마경은 재가불자이면서 높은 깨달음을 얻은 유마거사의 언행을 기록한 경전이다. 유마경 보살품에는 지세보살이 등장한다. 지세(持世)보살은 중생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하는 출가자이다. 하루는 마왕이 지세보살을 유혹하기 위해 제석천(하늘의 천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왕은 지세보살을 칭송하며 자신이 거느리는 여자들을 시녀로 삼아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지세보살은 자신은 출가자이므로 여자들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이때 유마거사가 나타나 마왕에게 자신이 그 여자들을 다 거두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왕의 여자들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기쁨에 대해 이렇게 설법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즐거움,
자신과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에게 미움이나 노여움을 품지 않는 즐거움,
좋은 벗을 사귀는 즐거움, 나쁜 친구의 악행을 고쳐 주는 즐거움,
진리를 흠모하여 큰 기쁨을 얻는 즐거움, 방편에 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는 즐거움,
그리고 깨달음의 길을 배우는 가운데 쉽사리 방종에 빠지지 않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모든 보살이 누리기를 원하는 법의 즐거움입니다.”
(유마경 보살품 지세보살편, 박용길역 민족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가 끊긴 곳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즐거움이 머물 자리가 없다. 도덕적 정당성은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되지만, 때로는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는 권위의 허상이 되기도 한다. 유마거사는 지세보살에게 여자를 멀리하는 계율의식이 도리어 중생을 외면하는 모순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계율마저 내려놓으라는 유마거사의 법문은 자기를 내려놓은 수행이 얼마나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일인지 깨닫게 한다. 그 속에는 모든 존재의 실상은 무아(無我)이며 공(空)하다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다.
도덕적 정당성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큰 장애이다. 급식봉사를 하다보면, 긴 줄을 마다하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이 종종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발산하는 노숙자들의 분노는 더욱 큰 문제이다. 단순히 새치기를 하는 상황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다. 때로는 사람이 많아 미처 음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때 못 받은 사람의 분노도 증오에 가깝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구실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명분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통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바라다보면, 분노를 가슴에 간직하는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깨닫게 된다. 분노를 표출할 명분을 찾는 것도 기실 분노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아닌가. 정당한 명분이나 도덕적 강요도 결국 숨은 분노를 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불공평한 조건이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중의 하나이겠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분노를 넘어설 수 있는 그 이상의 깊고 높은 것을 갖추고 있다. 음식이 모자랄 때 미안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분노를 내려놓은 사람도 보았다. 나중에는 음식이 모자라 난감해하는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한다. 노숙자들을 만날 때 내게 흐르는 평화는 모두 이 분들의 성찰과 자비심 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우리 단체에서 활동하는 동안이라도, 나를 내려놓은 성찰의 끈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
- 작은손길(사명당의집) 대표 김광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