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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백봉 김기추선생님의 새말귀 - 재가자를 위한 새로운 수행법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4.12.17|조회수55 목록 댓글 0

백봉 김기추선생님의 새말귀 - 재가자를 위한 새로운 수행법 

 

차례
(1) 깨달음의 사회화
(2)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의 수행
(3) 백봉선생님의 새말귀
(4) 새말귀 수행의 실제

 

(1) 깨달음의 사회화
몇 년 전 우리 불교계에는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다. 산중에 머물러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 사회에 알려 널리 중생을 제도하자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보다 아상을 버리고 생사를 넘어서는 데 있다고 한다면, 해방 이후 좌우 대립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온 우리 사회에 오히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의 불교현실을 보면, 실제 현실적인 동력은 부족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해야할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할 수행법은 무엇인지, 이런 문제에 대해 불교계 안에서 일정한 합의나 토론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불교가 아직 대중에게는 문턱이 높은 탓도 있고,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관념적이거나 원론적인 단계에 머문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슬로건은 불자들에게 중요한 시대적인 문제의식을 남겨주었다. 

 

종교가 사회에 개입하는 것은 일반 정치나 사회운동과는 성격이 다르다. 종교나 도덕을 상대방에 전하는 것은 전하는 사람의 책임이 뒤따른다. 말하자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철학이나 진리를 담지하고 스스로 증명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더구나 불교는 수행의 종교이기 때문에 더욱 이 점이 강조된다. 불교가 사회 구성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이며, 그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법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래 항목 2)에 소개하는 경전은 부처님이 속가의 아들 라훌라에게 하신 설법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출가한 라훌라는 아버지의 후광을 믿어서인지 다소 철없는 행동을 했던 것 같다. 출가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자식에게 직접 설법을 하셨다. 자신의 친 아들에게 자상하게 설법한 <라훌라의 경>을 살펴보면, 불교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하는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어서 이 글 항목 3)에서는 백봉 김기추선생님이 제창하신 새말귀를 살펴본다. 새말귀는 지금부터 40여 년 전 백봉선생님이 재가자를 위해 제창하신 새로운 수행법이다. 마지막 4)에서는 20여년 가까이 새말귀를 수행한 필자의 경험을 기록하였다.


 

(2)부처님의 아들 라훌라의 수행

<라훌라의 경>
[세존]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어진 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냐?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그대는 존경하고 있느냐? 
[라훌라]
“늘 함께 살고 있다고 해서 어진 이를 무시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저는 항상 존경합니다.”
.[세존]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이 없이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 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마라.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印象)을 회피하라. 부정(不淨)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인상(印象)이 없는 경지를 닦아라. (내가 있다는) 교만의 잠재적 성향을 버려라. 그리하여 교만을 그치면, 그대는 고요하게 지내리라.”
이처럼 거룩한 세존께서는 라훌라 존자에게 참으로 이와 같은 시로써 되풀이해 가르치셨다.

<라훌라의 경 - 숫타니파타 제2 작은 법문의 품 11, 전재성 역 >

 

부처님은 먼저 수행의 선배어른들을 존경할 것을 당부하신다. 아들 라훌라가 교만하게 행동한 것을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다. 이어 좋은 벗을 가까이 하고 계율을 잘 지켜 수행자로서의 청정한 삶을 지킬 것을 당부한다. 수행공동체인 승가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라훌라의 경>에는 무엇보다 어린 라훌라가 닦아야 할 수행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먼저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여 몸(身)에 따르는 욕망과 집착을 조심할 것, 느낌(受)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여 탐심이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 부정관(不淨觀)을 닦는다.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은 호흡관(呼吸觀)을 의미한다. 이어 마음(心)속에 새겨진 탐욕의 대상, 즉 인상(印象)을 없애야 한다. 인상은 곧 욕망과 집착이 만든 기억이다. 인상을 성찰하여 없애는 과정이 사유수(思惟修)이다. 마지막으로 교만의 성향 즉 마음속의 교만을 버리는 것이다. ‘나’라는 교만을 없애는 것은 무상을 관찰함(無常觀)으로써 얻어진다. 이처럼 무아(無我)의 진리는 단순히 바라문에서 주장하는 아트만(眞我)이 없다는 철학적인 개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만을 없애는 수행이다.


 

(3) 백봉선생님의 새말귀
백봉 김기추선생님은 당신 스스로 무(無)자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 후 재가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셨다. 그 과정에서 선생님은 현재 승가에서 수행하고 있는 간화선이 재가자의 실정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 재가자에게 맞는 새로운 화두(新話頭) 즉 새말귀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당시 학인들은 간화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선생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무도 새말귀를 수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글을 올리는 사람도 부끄럽지만, 예외가 아니었다. 재가자의 수행에 대한 선생님의 문제의식은 선생님이 지은 <새말귀>글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거사풍(居士風)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성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미고 사회성이기 때문에 세간을 가꾼다. 가정을 꾸미기 때문에 오늘을 살면서 내일의 안정을 걱정하고, 세간을 가꾸기 때문에 오늘을 엮으면서 내일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시간을 쏟는다. 이러히 시간을 쏟기 때문에 아무리 생사의 뿌리를 캐어내는 좋은 수단이요 방편이라 할지라도 24시간 모두가 공부를 지을 수 있는 승가풍과는 달리 24시간 모두가 가정을 꾸미고 세간을 가꿔야만 하는 거사풍으로서는, 화두를 순일하게 지닌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기 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선생님은 간화선 수행법이 정법(定法)인양 붙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간화선은 지나(支那: 중국)의 한 시대의 방편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방편이 정법이 아닌 것은 금강경에도 나오는 설법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 학인들은 지와 행의 불일치에 대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였다. 선생님은 새로운 수행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인들의 완고하고 인색한 태도를 나무라셨다.

 

무슨 일로 고금의 수단과 방편을 정법(定法)인양 여겨서

권(權)과 실(實)을 맞세우고, 진(眞)과 가(假)를 견주며

오늘의 불행을 탓하고 내일의 광명을 얻는데 인색하랴!

 

새말귀 수행에 대해 선생님은 매우 구체적인 설명을 하셨다. 

 

대치법(代治法-간화선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란 이렇다.

“연(緣)에 따르는 바깥 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이는 것은, 실로 나의 무상신(無相身)이

그 심기(心機)의 느낌대로 무정물(無情物)인 색상신(色相身)을 걷어잡고 행동으로 나툰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무슨 까닭이냐? 예를 들어서 만약 핸들을 돌리고 키를 트는 데도 잘 돌리고 잘 틀어야 할 것이니,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와는 통하여서 그 실을 거둘 수가 있겠으나, (간화선처럼) 화두가 순일하여서는 (운전이) 또한 잘 안될 것이다. 사리(事理)가 이러하니, 학인들은 거사풍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서, 아침에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뜻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모습을 잘 굴린다”라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喜悅)을 느끼고, 시간을 얻어서 앉을 때는 “나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非明非暗) 바탕을 나투자”라는 여김으로 삼매(三昧)에 잠길 줄을 알면, 이에 따라 깨친 뒤의 수행도 또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 백봉 김기추선생님의 새말귀

 

새말귀를 우리 사회에 전할 가치가 있는가? 선생님은 새말귀 수행의 공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셨다.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와 “바탕을 나투자”라는 말귀로 하여금 오전수행(悟前修行) 곧 “앞닦음“과 오후수행(悟後修行) “뒤닦음”을 한가지로 굴려가자는 것이다. 되돌아 보건대 이 대치법은 자타(自他)의 공덕을 이루는 수단도 되겠지마는 사회의 풍조를 다스리는 방편도 될 것이니 어찌 금상첨화가 아니랴!

 

새말귀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되지만, 사회의 풍조를 다스리는 방편이 될 수 있다. 백봉선생님의 새말귀가 ‘깨달음의 사회화’라는 불교의 시대적 소명에 적합한 수행법이 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 새말귀 수행의 실제
백봉 김기추선생님이 지은 <새말귀>에 따르면, 새말귀 수행은 ‘모습을 잘 굴리자’와 ‘비명비암의 바탕을 나투자’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동안 옛 제자들과 만나 새말귀에 대해 토론을 해 본 결과, 수행의 형태가 다양하였다. 물론 새말귀로 수행하지 않는 제자들도 상당하였다. 새말귀로 수행하는 제자 중에는 ‘허공으로서의 나’를 말귀로 드는 도반도 있었고, 또 어떤 도반은 운전할 때는 ‘핸들을 잘 돌리자’로, 일할 때에는 ‘일을 잘 하자’와 같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새말귀를 드는 도반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는 ‘낮에는 모습을 잘 굴린다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 라는 뜻으로 희열을 느끼는’ 방식으로까지 수행하는 도반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새말귀를 들 수 있는 조건으로 백봉선생님은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에 어느 정도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첫째, 설법을 통하여 일체 만법인 상대성은 본래로 흘연독존(屹然獨尊)인 절대성의 굴림새라는 그 사실을 학인들에게  이론적으로 깨우치게 하고, 둘째 학인들은 반드시 무상법신(無相法身)이 유상색신(有相色身)을 굴린다는 그 사실을 실질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새말귀를 지님이 규범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위 법문만 가지고 볼 때, 새말귀를 들 수 있는 준비과정이 상당 기간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는 과학이 발달하여 현대인들은 옛 수행자와는 달리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선생님의 신념이었다. 선생님은 설법을 들은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젊은 도반에게 새말귀를 들라고 권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새말귀는 재가자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입문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새말귀에 퇴굴심을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떠올리며, 허공의 주인공으로서 모습을 잘 굴리자고 다짐한다. 낮에는 잘 굴리는지 확인하고, 저녁에는 오늘 하루 일을 되돌아보며, 모습을 잘 굴렸는지 살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수행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새말귀는 재가자의 생활자체가 곧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 되는 수행법이다. 위에서 인용한 백봉선생님의 글에서 보듯이 밥하고 운전하며 직장다니는 일 자체가 다 수행이 된다. 새말귀 수행은 궁극적으로 걸림없는 보살행으로 불법을 널리 편 유마거사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니, 이가 곧 거사풍이다. 새말귀와 거사풍은 참으로 백봉선생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백봉선생님이 세우신 보림선원의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허공과 모습 등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꾸준히 수행을 이어나가는 새말귀는 대승불교적인 관법수행이지만, 초기불교의 부정관 호흡관 무상관 등의 선정수행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일체 유위법을 꿈 허깨비 거품 그림자 등으로 관하라고 설하였다. 새말귀로 매일 꾸준히 성찰하면, 공성(空性)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자신을 실답지 않은 모습으로 굴릴 수 있다. 아울러 재가자로서 가정과 사회의 삶을 놓치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자세로 살게 된다.

 

새말귀 수행으로 공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제법불생(諸法不生)의 도리를 체득하여 마침내 자신의

참다운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선생님 말씀대로 동해의 바닷물을 한 입에 마시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모쪼록 새말귀 수행이 널리 퍼져, 유마거사와 같이 허공의 주인공이 되어 모습을 잘 굴리는 도반들이 많이 나오길 기도한다.
- 여운(如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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