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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02.19|조회수65 목록 댓글 0

불교는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와는 달리,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선포한 이가 곧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단순히 신앙의 대상에 머물 수 없습니다. 만약 신앙의 대상으로만 부처님을 바라본다면, 불교를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자라면 깨닫기 전의 부처님, 즉 인간 고따마(고타마)가 누구인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처님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자로서 부처님은 왜 출가를 했는지, 무엇을 고민하였는지,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떻게 수행을 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은 부처님이 무슨 고민을 안고 출가하였는가 입니다. 왜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집을 나왔는지, 그리고 그 고민은 자기 개인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그 너머의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경전을 읽다보면 우리의 의문에 빛을 주는 경전을 만납니다. 여기서는 특히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중 '큰 법문의 품'에 나오는 <정진의 경>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경을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부처님의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때는 불교가 생기기 전이라 승단이나 부처님의 제자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모습을 전해줄 수 있는 존재는 신화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진의 경>에서는 악마 나무치가 등장하여 부처님과 대화를 합니다.

 

악마는 힘써 정진하느라 죽음을 눈앞에 둔 수행자 고따마에게 수행을 그치고 차라리 불에 제사를 지내며 공덕을 쌓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호히 악마의 제의를 거부합니다. 오히려 제사지내며 공덕을 쌓는 당시 바라문과 일반 수행자들의 행위를 악마로 규정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아래와 같이 그들의 미망을 여덟가지로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것을 보면 수행자 고따마는 당시 바라문과 고행자들의 삶을 매우 깊이 이해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2) 미움, 3) 배고품과 목마름(기갈), 4) 갈애, 5) 권태와 수면(게으름), 6) 공포, 7) 의심, 8) 위선과 고집, 그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얻으려는 명예 명성 환대에 대한 집착,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부처님 당시 많은 바라문 성직자들은 제사를 지내주고 그 대가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재앙을 피하고 복을 얻는다고 주문을 제작하여 팔았습니다. 한 편, 고행자들은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수행을 과장하는 위선을 저질렀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과 고행자들의 이러한 위선과 탐욕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이 지적한 '의심, 위선과 고집, 그리고 잘못된 방법으로 얻으려는 명예 명성 환대에 대한 집착,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등은 오늘날에도 공감을 주기 충분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이 안고 있던 고민은 세상을 고통과 혼란으로 몰아넣는 인간의 무명(無明)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바라문이나 수행자 등 성직자들의 탐욕과 위선입니다. <정진의 경>에서 청년 수행자 고따마는 설령 피가 마르고 죽음이 닥쳐도 악마의 유혹에 물러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헛된 명성과 부당한 이익을 쫓는 당대 수행자와 바라문들을 보며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하며 탄식했습니다.

 

종교와 성직자가 타락한 세상에는 진리는 사라지고 어둠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초기 경전에서 우리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강조한 부처님을 자주 만납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진리를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부끄러움을 느낄 때, '멀리 여읨(원리 遠離)'과 '고요함(적멸 寂滅)'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통해 멀리 여읨과 고요함을 얻고, 더불어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는 만큼, 부처님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수행자가 지녀야할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여기서 '멀리 여읨'은 명예와 환대에 대한 집착, 위선과 고집,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등 '나와 내 것'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서 떠남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은 바라문과 고행자들도 벗어나지 못한 탐욕과 어리석음을 넘어 깨달음과 해탈의 길을 찾았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닦으면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지성과 사색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새벽을 여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은 <정진의 경> 첫 1번에서 17번 구절까지 인용한 것입니다. 이 경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혼란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청년 수행자 고따마가 꿋꿋하고도 치열하게 정진하는 모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고민한 '나고 죽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이며, 그 분이 얻은 해탈과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인간의 종교인 불교의 성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5. 2.18.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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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 "네란자라강의 기슭에서 스스로 노력을 기울여 멍에로부터의 평온을 얻기 위해 힘써 정진하여

선정을 닦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악마 나무치는 위로하여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악마] '당신은 야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당신이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입니다. 존자여, 사는 것이 좋습니다. 살아야만 공덕을 성취할 것입니다. 그대가 청정한 삶을 살면서 성화에 제물을 올린다면, 많은 공덕이 쌓이지만, 이러한 그대의 정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애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성취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부처님 곁에 서 있었다.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세존은 이와 같이 말했다.

[세존] '방일(게으름)의 친척이여, 악한 자여, 어떠한 목적으로 이 세상에 왔는가? 털끝만큼의 공덕을 이루는 것도 내게는 필요가 없다. 공덕을 필요로 하는 자, 그들에게 악마는 말해야 하리라. 내게는 믿음이 있고, 정진이 있고 내게는 또한 지혜가 있다.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삶의 보전에 관해 묻는가? 이러한 정진에서 나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 이처럼 용맹을 기울이는 나에게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르리라.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나는 새김과 지혜, 그리고 삼매에 든다.  이와 같이 지내며 나는 최상의 느낌을 누리니, 내 마음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기대가 없다. 보라, 존재의 청정함을!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그대의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 잘못 얻어진 이득과 명예와 칭송과 명성, 그리고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것도 있다.

 

나무치(악마의 이름)여, 이것들이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니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차라리 나는 문자풀(죽음을 각오하는 전투에서 군인들이 몸에 걸치는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이 세상에서

침몰하여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계행을 지닌 고귀한 님들이 가야 할 길조차 알지 못한다.

 - 숫타니파타 3. 큰 법문의 품, 2. 정진의 경 (전재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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