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아원에서 어린 아이를 학대하는 사건이 매일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시시티브이를 통해 아이들을 학대하는 장면을 접하면 눈을 감고만 싶습니다. 연약한 아이를 밀치면, 아이는 그야말로 종이가 날아가 듯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모든 유아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절망이 가슴을 막습니다. 뉴스를 보면, 부모와 유아원장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갑니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백혼무인은 도가(道家)의 전설적인 스승입니다. 자산과 신도가는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같이 공부하는 사이입니다. 자산은 정나라 재상을 지낼 정도로 벼슬이 높았고, 신도가는 반대로 태형을 받아 절름발이입니다. 자산은 신도가가 곁에 어른거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장자 내편 덕충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정나라 재상인 자산(子産)은 절름발이 신도가와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신분이 높은 자산은 형벌로 절름발이가 된 신도가를 업신여겼다. 그래서 신도가에게 자기가 출입할 때면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도가가 말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다리가 완전하다고 해서 절름발이인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화가 치밀지만, 선생님(백혼무인)이 계신 곳에 가기만 하면, 곧 마음이 쉬어져 돌아옵니다. 선생님이 나를 씻어주시는 것인지, 내 스스로 선해지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선생님을 따라 소요한지 19년이 되지만,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의식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그대와 나는 선생님 문하에서 마음을 소요하는 공부를 하는 중인데, 도리어 그대는 몸 밖에서 나를 붙잡고 시비를 따지니 어찌 잘못이 아닙니까?"
신도가의 말을 들은 자산은 부끄러운 듯 얼굴빛을 고치며 말했다.
"이만 그치시게나."
(장자 내편 덕충부편)
당시 춘추전국시대에는 국가끼리 전쟁이 빈번했습니다. 국가는 젊은이들을 전쟁에 앞세우고, 집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부역 식량 군복 등 전쟁에 필요한 부담을 지웠습니다. 평화롭게 농사짓고 사는 백성들이 남 죽이는 전쟁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자 국가는 법령을 세우고, 따르지 않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형벌이 남발되어, 백성들 사이에는 벌을 받지 않는 것을 요행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백성들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형벌을 받으면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기보다 재수 없이 걸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도가 또한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태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태형은 발뒤꿈치를 잘라 걷지 못하게 하는 못된 형벌입니다. 강제로 절름발이가 된 신도가 역시 당시 일반 백성들처럼 억울함이나, 분노, 회한이 많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도가는 스승의 곁에 있으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장애나 죄의식이 씻어졌습니다. 남들의 폄하나 장애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장자(莊子) 덕충부편에 나오는 신도가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옛 도가(道家) 사람들이 공부하던 방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말없는 가르침(不言之敎)은 노자도 일찍이 말했지요. 노자는 형벌이나 도덕을 앞세워 사람을 시시비비로 몰아대는 당시 춘추전국시대 정치를 비판했습니다. 노자는 시비우열로 백성을 다스리는 방식이 사람을 오히려 혼란으로 모는 현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벌과 도덕을 물리쳐야 백성들이 평화를 되찾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즘처럼 통신망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불신이 한 번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갑니다. 특히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공격은 설사 잘못이 밝혀졌다 해도 서로에게 반감과 증오만 낳습니다. 잘못을 사과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과가 건성이라는 것을 누구도 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성숙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을 눈 감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해결하는 좀 더 나은 과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잘못을 사과한 사람이 진정으로 짐을 벗어야 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증오와 오해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신도가가 스승 백혼무인에게서 배운 것은 소요(逍遙)입니다. 소요란 ‘멀리 떠나 노닌다'는 뜻으로, 여행과 뜻이 통하는 말입니다. 낮선 곳이나 먼 나라로 여행하면 누구나 어깨가 가벼움을 느낍니다. 이런 저런 일상의 시비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지요.
소요란 이렇게 자기와 남을 시비평가하는 태도에서 멀리 벗어나 무심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는 공부입니다. 같이 있기만 해도 저절로 마음의 평화를 얻는 옛 도가의 스승들의 가르침은 요즘 소리 요란한 설교나 법회를 생각하면 더욱 울림이 큽니다. 인내와 관용으로 긴 호흡을 하는 것이 왜 이리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는지요. 신도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사회의 평화에 대해, 그리고 참으로 마음을 쉬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공동선, 2015, 1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