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의 경>은 비록 짧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위로를 많은 받은 경이다.
이 경을 읽을수록 나는 어떻게 이런 경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는지 경이감마저
느끼게 된다. 다음은 경의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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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 때 마침 세존께서는 자신에게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품성)들이 버려지고,
무수한 착하고 건전한 원리(품성)들이 닦여져 원만하게 되는 것을 관찰하고 계셨다.
3.
그리고 세존께서는 그 뜻을 파악하시고 때맞춰 이와 같은 감흥어린 시구를 읊었다.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면,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 우다나(전재성 역) 6-3 <관찰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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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밑에서 고요히 선정에 든 스승을 본 제자는 스승을 어떻게 표현하게 될까? 혹 신비화하거나 권위적으로 묘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칫 스승에 대한 허구를 만들기 쉽다.
스승에 대한 존경은 때로는 경쟁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 교단에 대한 권력다툼으로 전락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그 어떤 경우도 스승의 실상과는 무관하다. 어떤 스승은 스스로 자신의 수행을 극적으로 꾸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허구나 위선은 결국 나중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승에 대한 잘못된 환상속에서 자신의 삶을 헛되이 마감했던가.
<관찰의 경>은 붓다(부처님)의 내면을 보여주는 경전이다. 붓다는 마음 속에 있던 악한 성품이 점차 사라지고, 선의 성품이 점차 성숙해지는 자신의 내면을 밝히고 있다.
붓다께서 당신의 내면을 제자들에게 진솔하게 말해주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붓다가 이렇게 당신의 내면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귀한 경전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을까?
<관찰의 경>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붓다의 내면세계가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권위적인 모습이나 초월적인 어떤 신화도 없다. 붓다를 따르는 제자나 후세의 수행자에게 이만큼 깊은 위로와 용기를 주는 가르침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붓다의 일생을 통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붓다에게서 믿음과 위로와 평안을 얻었다. 그들의 믿음과 귀의는 욕망과 집착의 부조리에 대한 붓다의 깊은 이해와 연민에서 일어난 것이다.
초기경전 <우다나>에 따르면, 붓다의 수행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부정관(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
2) 자비관
3) 호흡관
4) 무상관
부정관은 탐욕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법이다. 자비관은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호흡관과 무상관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법이다. 수행의 본질은 욕망과 집착에 대한 성찰이다. 위 네 가지 수행을 하다보면, 누구나 멀리 떨어져(遠離) 몸과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붓다의 제자들은 스승 붓다의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멀리여읨>과 <적멸>을 얻었다.
욕망의 성찰을 통해 얻은 고요한 마음의 평화, 즉 적멸(寂滅)은 현학적인 사변의 세계도 아니요, 초월적인 신통의 세계가 아니다. 적멸은 생로병사를 멀리 보낸 고요한 마음이지만, 아울러 악한 성품이 줄어들고, 선한 성품이 늘어나는 데서 오는 기쁨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