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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매화는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6.23|조회수58 목록 댓글 0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평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사람이 일생 가난하거나 초라한 인연을 만나도 자신의 지조를 팔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 실천하기 쉽지 않은 말입니다. 수행을 많이 쌓은 사람도 명예를 얻기 위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꾸는 일을 봅니다. 누구라도 형편이 어려우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해서 어려울 때마다 이 시를 읊으면 그 뜻이 새로워집니다. 퇴계 이황 선생도 이 시를 즐겨 외우며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방편을 쓰지 않는 옛 선승들의 의취가 숨어 있는 것 같아, 저는 이 시가 어느 옛

선사가 지은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근자에 우연히 이 시가 조선 중기시대의 뛰어난

문장가인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선생이 지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 추워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 바탕은 변함 없고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꺽여도 다시 새 가지를 낸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상촌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이름을 떨쳤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명나라와 주고 받는 외교문서 등 각종 의례문서를 짓고 시문을 정리하였으며, 성리학자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선생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기록을 보니, 선생의 인품도 과연 이런 시를 지을 만한 분입니다. 상촌 선생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늘 백성을 걱정하신 분이었습니다. 벼슬이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평생토록 검소하게 살았으며, 먹고 입는 것이 가난한 선비와 다름 없었습니다. 집이 가난해도 벼슬이나 자신의 처지를 이용해 재산을 늘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부인이 죽은 뒤에 첩을 두지 않았고, 임종하는 날까지 옷과 이부자리에 여벌이 없었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제사를 올릴 때에도 친척에게 빌려 물품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홀몸이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머니처럼 섬겼는데, 가정에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장남이 선조의 셋째 딸 정숙옹주와 결혼할 때 주위에서 좁고 누추한 집을 수선할 것을 권했지만,

'집이 훌륭하지 못해도 예(禮)를 행하기에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하기가 궁색한 선비와 같았다고 하니, 상촌 선생은 참으로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 같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노자는 일찌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했습니다만, 선생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부처님은 평생 집 없이 옷 한 벌과 발우(밥그릇) 하나로 살았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탁발이 끝나면 배가 고파도 참고 지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늘 '오늘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까' 근심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숫타니파타 <싸리뿟따의 경>. 수행자가 굶주림을 두려워하게 되면 음식이나 기타 옷가지 등을 얻기 위해 이런 저런 거짓을 만들어 내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타락한 탁발수행자들은 좋은 음식이나 의복을 얻기 위해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꾸며대기도 하고, 심지어 주문을 외우며 겁을 주어 사람들에게 재물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부처님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교활하게 사는 것은 쉽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집착을 여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은 어렵다'고 말씀했습니다 (법구경 244, 245 구절).

 

살다보면 가끔 답답한 일을 만나게 됩니다. 욕망과 집착의 거센 물결은 세간과 출세간을 가리지 않고,

지금도 사람을 흔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참으로 마음의 본질은 무명(無明)입니다. 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옛 사람의 글이나 행적을 돌아보면 정신이 새로워지고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다음은 상촌 선생이 남긴 시조입니다. 가만히 혼자 읊다보면, 행간 속에서 참으로 자신을 잘 지켜나간

선비의 풍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헸에라.
시비(柴扉 사립문)를 여지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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