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내린 뒤라 날이 선선해졌습니다. 비가 와서 몸은 시원한데, 마음마저 서늘하게 해주는 말이 그립습니다. 선가(禪家)에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말이지요. 원래의 뜻을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일어난 곳을 가리키는 화두이지만, 제게는 세상이 바뀌어도 마음이 아직 흡족하지 않다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요사이 불교계에 자주 회자되는 말을 보면, 염불해서 극락왕생하는 법문이나 현대인의 상처나 두려움을 치료하는 심리적 상담에 관한 글이 많습니다.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양한 고통을 제도하거나 치료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자꾸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곰곰이 그 까닭을 생각해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부처님의 법문이 메아리쳐 나오는데 밖으로 응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외침은 젊었을 때는 자주 듣던 법문입니다.
선남자여, 모든 공덕을 널리 중생에게 돌려주려는 원은, 맨 처음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는 일부터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까지 이 모든 원을 실천해서 얻어지는 일체의 공덕을 세계와 허공계가 다하도록 일체 중생에게 남김없이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중생이 항상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며 일체 병과 고통이 영영 없기를 바랍니다.
-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 보개회향원 (일부 인용)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은 지금 중장년 불자라면 누구나 젊었을 때 자주 접하던 보현보살의 법문입니다. 최근 입적하신 진관사 회주 무위당 진관스님은 평생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다고 합니다. 용성스님 운허스님 광덕스님 성철스님 법정스님 등 근세의 여러 선지식들은 모두 화엄경 보현보살의 행원을 법문하셨고, 스스로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지난 이 삼십 년 전만 해도 귀에 익던 화엄경 보현보살 법문은, 오늘 날 성공이나 출세라는 목표 앞에서는 낯선 말이 되었습니다. 성공은 모두 자기가 노력한 댓가이거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힘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모두 자기나 집단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제는 일체중생에게 모두 회향하는 보현보살의 발원은 불교계안에서도 점차 듣기 어려운 법문이 되었습니다. 제행이 무상하고 일체 법에 내가 없는 무아(無我)의 도리를 보살도로 승화한 보현보살의 가르침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법보시용으로 경전을 찍어 다음 생을 위한 복짓기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보살입니다. 따라서 보현보살이 세운 열가지 큰 행원(보현보살 십대원)은 구경의 깨달음 즉, 성불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인행(因行)입니다. 그동안 수행해서 얻은 모든 것을 중생에게 회향하리라 서원하는 보현보살의 행원은 일체 만법이 다 공성(空性)인 도리를 마음 속으로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는 원입니다.
만법이 공한 물리적 원리가 아니라, 자기가 힘들여 쌓아 올린 것이 다 공한 것임을 받아 들여야 진정한 보살행이 나올 수 있으니, 보현보살의 행원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공성이요, 곧 자비인 도리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초기불교에 비해 이런 저런 말이 있고, 오늘 날 그 폐단에 대해 저 역시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그래도 답답한 현실을 보면, 유마거사와 보현보살을 내세우는 대승불교야말로 겨울 언땅을 녹이는 봄소식입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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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불 작성시간 16.07.05 여운거사님! 오랜만에 대하는 형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보현보살은 실천궁행의 현장정신을 올곧게 구현하는 불교의 대표보살임에도 요즘 불자들이 보현보살의 정신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탄스런 불교계의 모습에 정문일침을 가한 멋진 글입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후학들에게 큰 깨우침을 줄 수 있는 존경스런 선배보살님으로 남으시길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나무대행보현보살.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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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반야심권오영 작성시간 16.07.06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나의 이 회향은 다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 상속하여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나무대행보현보살 나무대행보현보살 나무대행보현보살마하살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