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혜공대사 그리고 대안대사는 신라불교가 낳은 큰 보살입니다. 불교가 오로지 지식탐구의 대상이 되고 왕실의 전유물이 되었을 때, 이 세 사람은 세상 속에 들어가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냈습니다. 원효는 큰 바가지를 들고 노래와 춤으로 백성들과 함께 불법을 나누었으며, 혜공대사 또한 술에 취해 거리를 다니며 백성들과 어울렸습니다. 대안대사는 거리를 다니며 ‘평안하시오, 평안하시오(大安 大安)!' 외치며 목탁을 치고 다녔습니다. 이 분들의 보살행이 남달랐던 것은 형식을 뛰어 넘어 걸림없이 법을 굴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효대사는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의 뛰어난 저술로 중국 사람들도 해동보살이라고 추앙했습니다. 그러나 원효대사는 정작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혜공대사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혜공대사는 술에 취해 백성들과 어울렸지만, 이토록 경전과 수행에 두루 깊은 선지식이었습니다.
원효와 혜공대사의 삶은 츨가자의 계율에서 보면 비도(非道)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누구보다 부처님의 법을 실천한 수행자였으니, 같은 부처님의 법이라도 당시 왕실을 출입하는 스님들과 달랐던 것입니다. 책상다리에서 벗어나 직접 백성에게 다가간 원효와 혜공과 대안대사의 전통은 만법(萬法)이 모든 빈 공성(空性)의 도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법이 다 허망하고 자성이 없어 텅 비어 있으니, 너와 내가 따로 없으며, 나고 죽음도, 깨끗함과 더러움, 얻음과 잃음도 없습니다. 만법이 공하여 그 속에 둘이 없는 불이법(不二法)은 걸림없이 방편을 굴려 중생을 제도하는 대승불교의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법을 굴리는 전통은 오늘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월스님은 경허선사의 눈밝은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여느 큰 절 조실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작은 절의 일꾼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만주로 피난오는 동포들을 위해 밤새도록 주먹밥과 짚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힘겹게 넘어오는 고개마루 나무가지에 걸어 놓았습니다.
잠실 불광사를 창건한 광덕스님(1927 - 1999)은 대각사에 계실 때 새벽마다 인근 종로거리를 다니며 목탁을 치고 염불을 했습니다. 절에 앉아서 신도들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월간지 불광을 창간해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만날 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일체 만법이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을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불이법을 터득한 수행자라면 깨끗한 곳과 더러운 곳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불이법을 제창한 대승불교의 뜻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명예와 칭송과 재물이 있는 곳은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몰리지만, 괴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적막하기만 합니다.
지난 2012년 3월 세상을 떠난 허병섭 목사는 한국신학대학을 나와 빈민목회를 한 분입니다. 1970년대 초 청계천 일대의 꼬방동네가 철거되자, 허 목사는 성북구의 달동네로 들어가 교회(동월교회)를 차렸습니다. 고인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며 목사직마저 반납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장로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목사직을 반납하고 허병섭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자와 빈민들과 함께 싸우다 구속돼도, 경찰이 노동자에게는 거친 언행을 퍼부으면서도 목사에게는 존칭을 쓰며 대접하는 것이 죄스럽고 괴로웠다."
허병섭 목사는 목사나 사제직 자체가 장애라고 생각하기보다, 목사나 사제직에게 주어지는 대접이 힘들게 사는 이웃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임을 깨달은 분입니다. 목사에 대한 사회적 대접이 세상을 둘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본 것입니다. 허목사야말로 참으로 불이법을 실천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불이법을 설하는 사람은 많아도 몸소 진흙탕에 들어가 중생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수행자는 보기 어렵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이 둘이 아니라고 설하는 사람이 정작 진흙탕을 외면한다면, 과연 불이법의 펄펄 뛰는 맛을 알 수 있을까요?
원효와 혜공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포항에 있는 운제산 오어사(吾魚寺)에 전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원효와 혜공이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 다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냇가에서 똥을 누었다. 원효는 똥을 누는데, 혜공은 고기를 쏟아냈다. 혜공의 몸에서 나온 고기는 펄떡거리며 시냇가로 뛰어 들었다. 혜공대사는 원효가 눈 똥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汝屎吾魚 여시오어)"
똑같은 고기인데 왜 혜공의 몸에 들어가면 그대로 살아나오고, 원효의 뱃속에 들어가면 똥이 되어 나올까요? 세속적으로 본다면, 고기를 먹으면 더러운 똥이 되어 나오는 것이 정상이요, 고기가 죽지 않고 그것도 펄펄 뛰어 나오면 비정상입니다. 원효에게는 나고 죽음(生滅), 더러움과 깨끗함(垢淨)이 있지만, 혜공대사에게는 이 모두가 없습니다. 원효에게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눈다."고 한 혜공대사의 말은 원효가 비록 높은 학덕을 갖추었지만 아직 지와 행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자기 마음을 보지 않고서는 세상의 더럽고 깨끗한 것은 아직 내 마음의 미망(迷妄)과 무명(無明)이 만든 경계입니다. 혜공대사에게는 더러움과 깨끗함, 세간과 출세간(僧俗)의 경계가 없었지만, 스님은 스스로 술병을 들고 저잣거리로 들어갔습니다. 유마거사는 이러한 보살의 삶을 '길 아닌 길(非道之道)'이라고 했습니다.
재물이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항상 무상을 관하여 실제로 탐내는 것이 없습니다. 아내와 첩과 채녀가 있는 것을 보여 주지만 항상 5욕의 진흙탕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온갖 세속의 길에 두루 빠져드는 것처럼 보여도 그 인연을 끊으며,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을 나타내 보여도 생사를 끊어 없애지는 않습니다. 문수사리여, 보살이 도 아닌 길[非道 비도]을 행해 갈 수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유마경 제8. 불도품(佛道品) 일부 인용
중생이 진창에 갇혀 있으면 부르지 않아도 찾아가는 것이 불이법의 도리입니다. 강물속에 잠긴 시퍼런 달은 알몸으로 들어가 건져내야 합니다. 비도의 길에는 심오한 공성(空性)의 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운 201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