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비폭력대화를 위한 교사모임>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두 번째 시간의 주제는 욕망인데, 도가에서 다루는 <욕망>의 문제를 우리 학교교육의 현실과 연관해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여운) -
1) 생각의 출발
지난 <비폭력대화를 위한 교사모임> 첫 시간에서 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 성적이 뛰어난 학생일수록 폭력적인 경향을 자주 발견 한다. -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의 교육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말입니다. 성적이 좋다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학생은 어른이 되어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지만, 그 아이 속에 혹 감춰진 폭력성은 어떻게 될까요? 대학입학과 동시에, 또는 좋은 직업을 얻으면 사라질 수 있을까요? 많은 심리학자들은 마음의 상처는 주는 사람이나 받은 사람 모두에게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의 공동체가 평화를 잃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2) 감출 수 없는 미움과 욕망
지난 14일 프랑스 니스에서 튀니지 출신 이민자가 차량으로 독립기념일 축제를 즐기던 사람들을 치어 80여명이 죽었고, 몇 달 전인 지난 3월 22일에는 벨기에 공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해 32명이 사망했습니다. 바로 지난 7월 26일에는 프랑스 북부 생테티엔 뒤 루브래 성당에서 나이 든 신부님(자크 하멜 86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범인 2명 중 1명은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 국가(IS)에 가담하려던 알제리계 청년(아델 케르미슈 19세)로 알려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최근 유럽에서 발생하는 테러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테러를 자행하는 범인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대체로 어린 편이고, 이슬람권 국가에서 이민을 왔거나 시리아·아프가니스탄 등 지역에서 온 난민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은 한결같이 마음속의 증오를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으로 표현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며 이슬람 해방을 외치는 것은 그들이 사회(주로 서구사회이지요)에서 받은 상처를 정치적 명분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증오가 강하면 증오를 쏟아낼 명분에 열광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 법조계에서 일어나는 일부 법조인들의 탐욕은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법에 대한 지식을 악용하여 부와 명예를 쌓는 행위는 법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받은 고액의 변호사비 또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금액의 규모는 대다수의 양심적인 법조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법조계의 한 고위공직자도 “검찰 조직의 고위 간부가 공직을 치부(致富)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허탈을 넘어 수치심마저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언론에서 문제 삼고 있는 법조인들은 대부분 제도교육에서 최고의 성적을 성취한 사람들입니다.
3) 욕망을 관찰하는 자
오늘 토론의 주제는 욕망입니다. 욕망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띠라서 오늘 이 모임에서는 사회(학교)가 인간(학생)에 대해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토론했으면 합니다. 즉, 학교 교육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교육을 통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즉, 교육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학생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다스리는지) 대화와 사색을 나눕니다. 무엇보다 교육과정을 거친 학생은 과연 어떤 인간이 되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지하게 살펴보자고 하는 것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성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우리 내면을 보지 못하면 현실의 갈등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성찰되지 않은 가치관은 현실의 문제를 맹목적으로 은폐하거나 외면하여, 마침내 우리 스스로 이웃과 형제 자식의 고통을 억압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법조계의 혼란도 이슬람전사들의 테러도 내적 혼란과 갈등을 외면한 결과입니다.
4) 장자(莊子)의 문제의식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B.C. 370-290) 역시 당시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현실을 고민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제후(왕)들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초빙했습니다. 학문의 본령은 전쟁에서 이기는 데 있었으니, 병법과 군량미 생산(농사)과 외교(유세)와 정치에 관한 학문이 유행했고, 당연히 많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 천하의 전문가(스승)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지식을 얻은 사람들은 왕에게 자기의 지식이 백성을 통제하고 전쟁에 이기며 마침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천하를 다니며 유세했습니다.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 벼슬과 재물을 얻었습니다. 장자는 부모와 농토를 버리고 헛된 욕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풍조를 탄식했습니다.
한비자는 이러한 풍조에 대해 당시 한 집 건너 병법 책이 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장자는 당시 경세가들의 뜻대로 백성을 국가의 한 생산단위로 개조할 수 있는지, 백성을 국가에 복종하는 규범적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정책이 실현된 결과 과연 백성들이 행복해졌는지 물었습니다. 노자와 장자 등 도가(道家) 철학자들은 인간의 타고난 자연성을 파괴하는 어떤 이상적 규범도 실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자 마제편의 말 이야기>
말은 발굽으로 서리와 눈을 밟고, 털로는 바람과 추위를 막고 있다. 풀을 뜯고 물을 마시며 발을 높이 들고 날뛴다. 이것이 말의 참된 본성이다. 비록 높은 누대와 궁궐이 있다 해도 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백락이 '나는 말을 잘 다스린다'고 하면서, 말에게 낙인을 찍고, 털을 깎고, 발굽을 다듬고, 굴레를 씌우고, 고삐와 띠를 맨 다음 구유가 딸린 마구간을 짓고 넣어두었다. 그러자 말 중에 죽는 놈이 열 마리 중에 두세 마리가 나왔다. 거기에다 말을 굶주리게 하고, 목마르게 하고, 너무 뛰게도 하고, 갑자기 달리게도 하며, 여러 가지 장식을 붙여 보기 좋게 꾸며 주었다. 말의 앞에는 거추장스러운 재갈과 머리장식이 있게 되었고, 뒤에는 채찍의 위협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자 죽는 말이 반도 넘게 되었다.
- 장자 외편 마제 (莊子外篇 馬蹄)
<장자 달생편의 말 조련사 이야기>
동야직이 수레를 모는 기술을 가지고 장공을 만났다. 그의 수레 모는 솜씨는 나가고 물러나는 것이 먹줄에 들어맞을 듯이 곧았고, 좌우로 도는 것은 그림쇠에 들어맞을 듯이 정확하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장공은 옛날 조보도 이보다 더 낫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밭이랑 길을 돌아오도록 했다. 안합이 그를 만나고 돌아와 장공에게 말했다. "동야직의 말은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장공은 묵묵히 대답을 않고 있었는데, 과연 조금 후에 말이 쓰러져서 돌아왔다. 장공이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말이 쓰러질 것을 알았습니까?" 안합이 대답했다. "그는 말의 힘이 다 했는데도 계속 달리게 하려고 했으므로 쓰러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 장자 외편 달생 (莊子外篇 達生)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에 대해 장자는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殺盜非殺)
(장자 외편 천운편)
몰래 숨겨놓고는 못 찾으면 바보라 하고, 어려운 일을 만들어 놓고는 감당하지 못하면 죄를 주고, 길을 미리 만들어 놓고는 이르지 못하면 처벌한다. 결국 백성들은 살기 위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장자 잡편 즉양)
5) 노자(老子)의 통찰
노자는 인간성의 문제가 곧 정치도덕에서 온다고 보았습니다. 나라에서 갖가지 법과 형벌로 협박하고 상으로 회유하면서 백성을 나라에 충성하는 존재로 만들어 마침내 전쟁의 도구로 쓰는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노자는 당시의 정치도덕(예를 주장하는 공자의 유학이나 법가의 학문)이 가져오는 현실의 모순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령이 발달할수록 도둑은 많아지고, 나라에서 금지하는 것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더 가난해진다. 기계가 발달하면 나라가 더 혼란해진다.
- 노자도덕경 57장
성인(聖)을 끊고 성인의 지혜(智)를 버리면 백성에게 백배의 이익이 되고, 인(仁)을 없애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이 다시 부모를 잘 모시고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 노자도덕경 19장
학문을 할수록 이익과 재물에 밝아지는 것은 학문이 이런 미끼를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병법가나 전략가들은 재물과 명예가 인간을 파괴하고 있는 이런 현실을 역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적국을 멸망시키려고 상대 나라의 왕에게 미녀를 보내거나 귀한 보석 등의 선물을 주어 왕이 정사에 소홀하게 만들기도 하고, 아울러 임금과 신하 사이에 내분을 일으켜 충신을 역적으로 누명을 씌워 죽게 하기도 합니다.
노자는 명예와 재물로 사람을 부추기는 학문은 결국 인간성을 왜곡하고 파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자는 이런 정치를 미명(微明)이라고 했습니다. 미명은 작고 하찮은(微) 지혜(明)라는 뜻입니다. 노자는 당장의 효과만 기대하고 결과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정치가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장차 움츠리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펴주고, 장차 약하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하며, 장차 망하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하며, 장차 빼앗으려고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준다. 이것을 미명(작고 하찮은 지혜)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연못을 떠나서는 안 된다. 나라의 이기(利器)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노자도덕경 36장)
將欲噏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장욕흡지 필고장지 장욕약지 필고강지 장욕폐지 필고흥지 장욕탈지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필고여지 시위미명 유약승강강 어불가탈어연 국지이기 불가이시인
정치를 하면 누구나 인위적인 수단을 쓰려는 유혹이 일어납니다. 노자는 벼슬이나 재물 등 미끼(利器)를 백성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연못에 잘 노는 고기를 미끼를 이용해서 물 밖으로 꺼내면, 결국 고기가 죽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도덕경 36장에서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고기는 연못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자연에 존재하는 고유한 질서(道)를 존중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인간의 자연성을 존중할 때, 즉 인위적으로 명예와 재물로 유혹하지 않을 때 세상은 본래의 자연적 조화가 회복된다고 말했습니다.
6) 도가(道家)의 이상
도가에서 본다면, 교육제도가 학생들에게 사용하는 인위적 수단은 성적(점수나 석차)과 칭찬입니다. 좋은 성적은 칭찬과 함께 소위 미래의 명예와 부귀를 보장합니다. 칭찬의 본질은 미래에 대한 안전입니다. 그러나 성적과 칭찬은 반대로 경쟁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욕망과 두려움을 함께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무엇보다 사람을 복종시키고 슬픔을 일으킵니다. 이 모든 인위적 수단에는 학생을 관리하고자 하는 교육의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욕망과 두려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폭력 없는 대화가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 욕망과 미래의 두려움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도가에서는 욕망과 두려움은 정치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인 수단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두려움을 버리고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때, 욕망의 뿌리는 자연적인 욕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욕망을 추구하는 태도를 중지하고 빈 마음으로 바라보면(致虛守靜), 자연적인 욕구는 매우 소박합니다. 소박함을 받아들이면, 자연은 스스로 조화와 균형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자연적 욕구(道)에 대해 공감할 때, 타협과 조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정치나 교육의 수단(욕망 부추기기)에 대한 도가(道家)의 성찰은 오늘 우리의 교육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자연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한 진지한 사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참석자의 질문)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거나 존중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생명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생명은 믿음의 대상입니까? 만약 선생님의 말대로 생명이 스스로 자족하고 질서가 있다면, 우리의 일상 삶속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답변)
무기력, 지루함, 피로, 혼란 등 이 네 가지는 사회의 규범적 입장에서는 일탈과 불성실의 모습이지만, 실상 생명이 자기 회복을 위해 우리에게 주는 신호(시그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나 주위에 이 네 가지 현상이 나타나면, 오히려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생명이 이렇게 신호를 보내는 것은 생명 스스로 질서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기력 지루함 피로 혼란 등을 생명의 신호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관찰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규범적 가치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인위적 수단의 미망을 성찰할 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여운 201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