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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스승의 주먹(師捲)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8.20|조회수37 목록 댓글 0

아난(아난다)존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처님과 성이 같은 석가족이고, 사촌동생입니다. 게다가 부처님을 가장 오래 모셨으니, 승단 안에서의 권위 또한 높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구니 교단을 만들자고 부처님에게 간청해서 허락을 얻은 이도 아난존자였습니다. 자기방어를 하기 힘든 여성이 탁발수행자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인데, 결국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여성도 수행하면 남자와 똑같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진실 앞에는 부처님도 더 이상 아난존자의 주장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남성 위주의 고대사회에서 여성에게도 깨달음의 문을 열어준 아난스님은 참으로 세상의 절반을 바르게 본 사람입니다. 미국에서 백인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때가 지금부터 불과 100여 년 전인 것을 생각하면, 아난스님의 넓은 안목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 당나라 스님 현장은 인도에서 머물 때, 비구니 스님들 처소에 아난존자의 초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니, 당시 비구니 스님들이 아난스님을 얼마나 추앙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난스님은 소신이 있는 수행자이지만, 또한 매우 겸손한 분입니다. 스님은 자신과 관련된,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사권(師拳, 師捲)'에 대한 이야기를 후세의 불자들에게 전해줍니다. 사권은 '스승의 주먹'이란 뜻입니다. 사권은 스승이 제자에게 법의 정통성을 전하는 인도 고대 종교교단의 관습입니다. 스승은 죽을 때 그의 깨달음이나 교리의 비밀을 손바닥에 적습니다. 그리고 상수제자를 불러 주먹을 펴서 손바닥에 적을 것을 보여줍니다. 상수제자는 스승의 주먹에서 최후의 비결이나 깨달음의 정수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제자는 스승의 자리를 잇게 됩니다.  

아난존자도 부처님이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처님에게 사권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자신이 교단의 대표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걸까요? 경전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 후 세존께서 안거에 들었을 때에 심한 질병이 생겼다. 고통스러운 느낌 때문에 사경에 들 정도였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곳에서 깊이 새기고 올바로 앎으로서 고난을 겪지 않고 참아내셨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질병에서 일어나셨다. 질병에서 일어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정사에서 나와 승원 뒤의 그늘에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존자 아난다는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은 아난다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참아내셨으니 더없이 기쁩니다. 세존께서 병이 드셨기 때문에 실로 저의 몸은 마비되고 제 앞은 캄캄하고 가르침도 제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의 승단을 위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전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 안심을 하였습니다.”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 없이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師拳)은 없다. 아난다여, 여래는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수행승의 승단에 관하여 더 이상 무엇을 언급할 것인가?

-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6권 75쪽 47:9(1-9) <질병의 경> 일부 인용

사권을 묻는 아난존자에게 부처님은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남김없이 모두 설했으니, 당신에게는 어떠한 감추어진 사권도 없다고 말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은 당신이 승단을 이끌어간다든가, 또는 누가 승단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지시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스스로 세운 교단에 대해 어떠한 권위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아 오면서, 수행단체가 크든 작든, 조직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해야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는 스승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스승의 임종을 전후하여, 서로 후계자가 되려고 싸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재산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면, 평생의 수행이 무너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아난다여, 나는 지금 늙고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만년에 이르렀다. 내 나이는 여든을 넘어서고 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레가 밧줄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되듯이, 여래의 몸도 가죽끈에 의지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아난다여, 지금이든 내가 멸도한 뒤에든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않는다면, 그들은 누구라도 배우고자 열망하는 나의 수행승들 가운데 최상의 존재들이 될 것이다.”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질병의 경>(일부 요약)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섬으로 삼아 수행하라'는 부처님의 말은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처님 임종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와 차별이 없으니, 누구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자가 부처님의 최상의 제자입니다. <질병의 경>을 읽으면, 권위에 둘러싸여 법당 위에 높이 앉아 있는 부처님이 아닌, 여든의 나이에 죽음을 눈앞에 두면서도 진리 앞에 겸손한 한 꼿꼿한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마경>을 보면 사권을 거부한 부처님의 뜻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자애심이 무엇이냐고 묻자, 유마거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空)과 무아(無我)의 도리를 알기에 시달림을 모르는 자애심이며, 스승의 주먹이 아니기에 법을 보시하는 자애심이며, 파계한 중생을 거두어 주기에 지계의 자애심입니다. (중략)       

- 유마경(박용길 역) 관중생품 민족사

위 유마거사 대답하는 구절 중 둘 째 줄 - "스승의 주먹이 아니기에 법을 보시하는 자애심이며" - 이 구절이 바로 사권(師拳)이 없는 부처님의 유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비밀이 없기에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그리고 남김없이 보시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참다운 자애의 마음이라고 설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성불의 길로 이끄는 유마거사의 서원은 이렇게 부처님의 사권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마경 제자품(라훌라편)에는 장자의 아들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출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지만,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못해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유마거사가 여러 장자의 아들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바른 법 가운데에 마땅히 함께 출가하시오. 왜냐하면, 부처님이 계신 세상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 장자의 아들들이 말했다.

“거사님, 우리가 듣기로는 부처님께서는 부모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출가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유마거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대들이 위없는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내면, 이것이 곧 출가이며, 이것이 곧 구족계를 받은 것입니다.”

그 때 서른 두 명의 장자의 아들들이 모두 위없는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에 마음을 냈습니다. 

-  유마경 제자품, 라훌라 편
 

유마거사가 진정 미래 재가불자들의 좌절을 미리 보았던 까닭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니면 유마경이 편찬된 시기에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이 권위의 틀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인지요? 재가자라도 깨달음에 뜻을 세우면 곧 출가이며, 뜻을 세운 사람이라면 심지어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같다고 강조하는 유마거사의 말은 어찌 보면 매우 과격합니다. 그러나 폐쇄적인 권위와 차별을 거부하는 불교의 진리정신에 비추어 보면 유마거사의 말은 한 시대 승단의 바위같이 견고한 교만과 권위를 깨우는 죽비입니다. 

깨달은 진리를 남김없이 모두 공개한 석가모니 부처님, 천대받는 여성도 진리에 다가갈 수 있게 한 아난존자, 사는 동안 복이나 짓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좌절하는 재가불자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준 유마거사 등 불교에는 이처럼 일체 중생이 깨달음을 얻는 진리와 자비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스승이라고 해서 움켜지고 숨기는 사권이 없습니다. 가르고 나누고 폄훼하고 군림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진리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은 무엇보다 나를 내려 놓는 그래서 유혹을 이겨낸 진실한 수행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여든의 나이에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여느 교단의 스승처럼 후계자를 지명하여 늙은 한 몸을 편안하게 할 유혹을 버렸습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열반한 뒤 경전을 암송할 때 부처님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사권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자신에게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후세에게 전해 차별과 권위가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렸습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내 것'에 대한 탐욕과 권위에서 멀리 떠나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길입니다. 이 진리를 통해 부처님은 스스로 자유의 길을 걸었으며, 교단의 수행자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 깨달음과 해탈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권을 거부한 부처님의 뜻을 새기며, 다시 한 번 우리의 삶과 수행을 돌아봅니다. 

(여운 2016. 8. 19)

사족)

우리가 흔히 보는 유마경은 구마라즙이 번역한 것입니다. 구마라즙은 중국인들에게 사권(師拳)을 번역할 때 의역을 했습니다. 혹 고대 인도 교단의 풍습을 설명하기 번거로워서가 아닌지요. 구마라즙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법을 보시하는 자비를 행하여야 하니, 아끼고 감추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行法施慈 無遺惜故)" - (유마경 관중생품)

참고로 현장이 번역한 유마경(설무구칭경)에는 사권을 직역했습니다.  

- "법을 보시하는 자애를 닦으니, 사권(스승의 주먹)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修法施慈離師捲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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