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의 행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장면에 놀라게 됩니다. <숫타니파타(제2 작은 법문의 품)>에 나오는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도 그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처음 이 경전을 대했을 때 한동안 책을 덮지 못했습니다. 신화와 권위에 둘러싸여 법당 안에 돌처럼 앉아있는 부처님이 아니라, 세상을 고민하며 사람들과 부딪치는, 살아 움직이는 지성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에는 젊은 부처님과 당시 부유하고 학식이 높은 나이 든 바라문들이 만나 서로 토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토론의 주제는 놀랍게도 '옛 바라문의 삶'입니다. 즉, 옛 바라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지금 바라문의 삶을 상대적으로 비판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전에 등장하는 부유하고 연로한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고따마>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을 '세존'이라든가 '붓다(깨달은 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을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법을 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상좌부의 주석에 따르면, 승단(상가)이 일정한 규모로 형성된 기간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사람들에게 설법한지 약 20여 년 뒤인 55세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전이 설해진 시기는 승단(상가)이 형성되기 전, 즉 부처님이 40대나 늦어도 5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짐작됩니다. <숫타니파타>에는 불법승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 대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법) 두 가지에만 귀의하는 이귀의(二歸依)가 자주 나타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40대 정도의 나이는 한 종교의 수장으로서는 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종파의 스승들이 대부분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사위성)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마침 그 때 많은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한, 꼬살라 국의 큰 부호들인 바라문들이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 그들 큰 부호들인 바라문들은 세존께 여쭈었다.
[바라문들] “고따마시여, 대체 현재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봅니까?”
[세존] “바라문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바라문들] “그러면, 고따마시여,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옛날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세존] “그러면 바라문들이여, 잘 듣고 새기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
[바라문들] “ 세존이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 바라문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1 - 4번 구절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나이가 많고 재산이 많은 바라문이라면 당연히 당시로서는 세력이 있는 원로 바라문들입니다. 그들은 젊은 수행자(부처님)를 찾아와, 지금의 바라문들은 옛 바라문들이 살았던 방식으로 사는지 물었습니다. 젊은 수행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의 답변은 수천 년 내려오는 베다의 전통을 자랑하는 바라문들에게는 매우 모욕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은 벽두에서부터 생생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 옛날 바라문들의 삶에 대해 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옛날에 살던 선인들은 자신을 다스리는 고행자였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대상들을 버리고, 자기의 참된 이익을 위해 유행하였습니다. 그들 바라문들은 가축도 갖지 않고, 황금도 곡식도 갖지 않고, 그러나 베다의 독송을 재보와 곡식으로 삼아, 하느님의 보물을 지켰던 것입니다. 갖가지 채색으로 물들인 의복과 잘 만들어진 침상과 주거를 갖춘 풍요로운 지방과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들 바라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바라문들은 처형을 면하고 재산의 압류를 면하였으며, 정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이 집집마다 방문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을 결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의 바라문들은 사십 팔 년 동안이나 동정을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았고, 명지와 덕행을 구했습니다. 그 후에 바라문들은 다른 계층으로 가서 아내를 구하지 않았고, 아내를 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화목하여 즐거워했습니다. 월경 기간이 끝난 후에, 바른 시기를 제쳐두고, 그 사이에 바라문들은 결코 성적 교섭을 갖지 않았습니다. 청정한 삶과 계행을 지키는 것, 정직하고 친절하고, 절제하고, 온화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리고 또한 인내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으뜸가는 용맹스런 바라문들은 성적 교섭에 빠지는 일을 꿈속에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행동을 본받아, 이 세상에 일부 양식있는 사람들은 청정한 삶을 사는 것과 계행을 지키는 것과 인내하는 것을 찬탄했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5 - 14번 구절
부처님의 설명과 같이, 옛 바라문들은 가축도 갖지 않고, 황금도 곡식도 갖지 않고, 그러나 베다의 독송을 재보와 곡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걸식을 했으며, 사람들은 음식을 조리해 존경과 믿음의 표시로 문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남을 해치지 않으며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지켰습니다. 국왕들은 바라문들을 존경했으며, 법으로 보호했습니다. 바라문들은 일반 백성과 달리 형벌과 고문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설명은 계속됩니다.
“그들은 쌀과 침구와 의복과 버터와 기름을 정의롭게 모아 그것으로 제사를 지냈고, 제사를 지낼 때에 결코 소를 잡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제 또는 다른 친척들과 마찬가지로 소들은 우리들의 최상의 벗입니다. 그리고 소들한테서는 약들이 생깁니다. 소들은 음식을 제공하고, 근력을 제공하고, 훌륭한 용모를 제공하고, 또 좋은 건강을 제공합니다. 소에게 이러한 이익이 있음을 알아, 그들은 소를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라문들은 손발이 부드럽고 몸이 크며 용모가 단정하고 명성이 있으며, 몸소 실천하며 할 일은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이 세상 사람들은 안락하고 번영했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15 - 18번 구절
부처님은 옛 바라문들은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잡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제사를 지낼 때 소를 잡는 일이 부처님 당시 매우 중요한 종교적 논쟁의 대상이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당시 바라문들의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였습니다. 옛 바라문들은 사람들이 준 쌀과 침구와 의복과 버터와 기름 정도의 물품으로 소박하게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 바라문들은 호화롭고 거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사가 이처럼 규모가 커진 이유에 대한 부처님의 통찰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런데 하잘 것 없는 것 속에서 하잘 것 없는 것, 왕자의 영화로운 삶과 화려하게 단장한 부인들을 보고 나서, 그들에게 전도된 견해가 생겨났습니다.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눠지고 잘 배치된 주택과 거처를 보고 나서입니다. 소들의 무리에 둘러싸이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뒤따르는 인간의 막대한 부를 누리고 싶은 열망에 바라문들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다의 진언들을 편찬하고, 저 옥까까 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바라문들] ‘당신은 재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을 재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 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핀을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바라문들에게 재물을 주었습니다. 소들과 침구와 의복, 잘 치장한 여인들,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고 잘 배치된, 즐길 수 있는 주택을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들에게 재물로 주었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19 - 23 구절
옛 바라문들은 세력이 크고 호화로운 삶을 보자 욕심이 일어났습니다. 점점 왕들이 누리는 영화와 옷차림이 화려한 부인들, 준마가 끄는 아름다운 마차, 잘 지어진 거처와 집들, 그리고 많은 무리의 소, 여러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인간의 부유함을 본 바라문들은 이것들을 탐내기 시작했습니다. 바라문들이 부를 얻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곧 규모가 큰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면 많은 재물을 보시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대한 제사의 형식과 이에 걸맞은 주문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라문들은 옥까까왕(감자왕: 전설 속에 나오는 고대의 왕)을 찾아가 말을 위한 제사, 인간을 위한 제사, 물의 축제, 소마에 대한 제사 등 갖가지 제사를 지내라고 부추겼습니다. 이 모든 제사의 명분은 왕의 순조로운 통치와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준 대가로 바라문들은 왕에게서 소, 침구, 의복, 잘 차려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장식을 한 수레, 그리고 갖가지 곡식을 가득 채운 화려한 저택을 받았습니다. 실상 왕들이 이렇게 엄청난 재물을 보시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통해 약탈한 전리품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들 재물들을 보면, 당시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반증하고 있습니다.
바라문들이 제사를 크게 지내게 된 것은 하늘의 명령도 아니요, 신비한 초자연적 기적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호화로운 재물과 잘 치장한 여인들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부처님은 주장합니다. 부처님의 표현을 빌면, 전도(轉倒)된 견해 즉, 헛된 망상입니다. 제사와 주문으로 종교적 권위를 행사하는 원로 바라문들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주장은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드는 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 사회에서 누가 제사와 주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면, 명예훼손이나 모욕죄로 고발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소들과 침구와 의복, 잘 치장한 여인들,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고 잘 배치된, 즐길 수 있는 주택을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들에게 재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재물을 얻어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욕망에 깊이 빠져들자 그들의 갈애는 더욱더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베다의 진언을 편찬하여 다시 옥까까 왕을 찾아갔습니다.
[바라문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 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제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칼로 소를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칼로 소들이 베어지자 신들과 조상의 신령과 제석천, 아수라, 나찰들은 ‘불법적인 일이다.’고 소리쳤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24 - 30번 구절
제사와 주문으로 많은 재물을 얻은 바라문들은 이렇게 얻은 부귀를 축적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축적은 곧 미래(시간)에 대한 집착입니다. 부처님은 소유의 욕망에서 축적하고 싶은 욕망으로 나아가는 바라문들의 변화를 통찰했습니다. 부처님의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과 달리, 짐승은 미래에 대한 집착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시간의식이 부족한 까닭이지만, 설령 미래를 준비하더라도 자기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저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한계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끝 모르는 바라문들의 집착 때문에 세상이 혼란해지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탐욕과 굶주림과 늙음의 세 가지 병밖에는 없었소. 그런데 많은 가축들을 살해한 까닭에 아흔여덟 가지나 되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의의 폭력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것을 죽인다는 것은 그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 지내는 자들(바라문들)은 정의를 파괴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옛날부터 내려온 풍습은 지혜로운 님의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제사지내는 자를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평민이 나누어지고 여러 갈래로 왕족들이 분열하고,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왕족들이나 하느님의 친족들 또는 종족에 의해 수호되고 있던 다른 자들도 태생에 대한 윤리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31 - 35번 구절
재물을 축적하고자 하는 미래에 대한 집착이 결국 제사의 규모를 키우고, 인간에게 유익한 소를 잡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제사는 전쟁이나 특별한 날에 지냈지만, 이제 바라문들은 평상시에도 제사를 크게 지낼 명분을 세웠습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죽이게 되자 피해를 입는 계층은 소를 통해 우유나 연료를 얻거나 농사일을 하는 대다수 평민이나 농부들입니다. 소를 죽이게 되자,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인간끼리 서로 반목하고, 아내는 지아비를 멸시하며, 계층이 무너지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의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제사와 주문의 종교적 행위에 감추어진 위선에 대해서도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학식과 통찰은 히말라야 설산에서 고행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고도의 명상에 들었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역사인식은 부처님이 29살까지 왕궁에 있으면서 왕자로서 배운 학식과 정치적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의 비판은 출가 전에 습득한 학식과 경험에다 츨가 후에 얻은 깨달음이 서로 합해져 성숙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에게서 바라문 자신들의 역사와 삶에 대한 말을 경청한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칭송했습니다. 바라문의 삶을 가차없이 비판하는 젊은 수행자를 찾은 이들 원로 바라문들은, 비록 소수이겠지만, 열린 지성을 갖춘 성직자들입니다.
[바라문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재가신자로서 저를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 바쳐 귀의하겠습니다.”
-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36 구절 <끝>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을 읽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인 고통이 아니라, 현실에서 경험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괴로움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문들의 위선과 집착을 통찰한 부처님의 역사의식 속에는 부처님의 고유한 통찰, 즉 연기법(緣起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라문들이 욕망을 일으켜 나가는 과정을 연기법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라문들은 눈 귀 코 혀 몸과 생각을 통해 왕들이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을 보았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이 아름다운 형태 소리 향기 맛 감촉과 생각의 대상[六境]과 서로 만나 통해 접촉[觸]이 일어나고, 접촉에서 즐겁고 괴로운 느낌[受]이 일어납니다. 즐거운 느낌에서 애착[愛]이 일어나고, 애착에서 장차 소유하겠다는 욕망, 즉 취[取]가 일어납니다. 집착은 대상[有]에 대한 기억을 일으킵니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후회이며, 미래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러므로 유(有)에서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나옵니다. 금 은 주택 여자 음식 말 소 양 등의 온갖 재물 등 소유가 생겨나면[生], '나의 것'이 늙고 병들고 죽음에 따라[老病死], 우울 슬픔 고통 비탄(우비고뇌 憂悲苦惱)이 일어납니다. 고통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은 특히 다음 <성찰의 경>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이라도 세상에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을 '영원하다'고 보고, '행복하다'고 보고, '자기'라고 보고, '건강하다'고 보고, '안온하다'고 보았다면, 그들은 갈애를 키운 것이다. 갈애(愛)를 키운 사람은 취착(取)을 키운 것이다. 취착을 키운 사람은 괴로움(苦)을 키운 것이다. 괴로움을 키운 사람은 태어남(생)과 늙고 죽음(老病死)·우울·슬픔·고통·불쾌·절망(憂悲苦惱)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해탈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한다.
- <성찰의 경> 쌍윳따니까야 12:66 (7-6) 일부 인용
연기법은 12연기법이 일반적인 교리이지만, 여기서는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병사 우비고뇌 등 8연기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기경전에는 6연기, 8연기 또는 13연기 등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연기법적인 관찰이 나타납니다. 연기법을 이해한 사람은 '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립니다. 나아가 연기법의 핵심인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달아 생노병사에서 벗어납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은 학식있고 부유한 원로 바라문에게 바라문의 삶과 역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위선에 대해 두려움 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부처님을 보여줍니다. 특히 제사와 주문에 대한 부처님의 비판과 통찰은 지금도 여전히 이 시대의 혼란을 일깨우는 가르침입니다.
(여운 2016. 10.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