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 40여 년 전만해도 어느 가정이나 책장에는 사서삼경이나 동서양의 고전이 꽂혀 있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문학작품과 고전을 읽으며 밤을 새는 일이 흔했습니다. 사람 사는 도리를 논하는 자리에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풍성했던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인 풍조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인문학이 사라진 지금,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비를 통해서 입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소비자만 남았습니다. 종교 또한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단체의 규모나 종교간 경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도를 고객으로 취급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쫓기는 삶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라면 그래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앉아야 합니다. 자신을 수행자라고 여기는 것이 소중한 까닭은 몸이 힘들지만 그래도 앉을 마음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보는 수행은 곧 자신의 삶을 보는 것입니다. 주위를 보면, 현실을 등지고 사는 수행자를 이따금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삶의 짐을 나누지 않으면, 결국 수행자의 말과 행동은 주위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수행이 삶과는 동떨어진 또는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수행을 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못하면, 누구도 수행의 가치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출가 동기를 주목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가동기가 분명할 때 수행의 당위가 분명해집니다. 초기경전 숫타니파타를 공부하다 보면, 이러한 우리의 문제의식에 비전을 주는 경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4 <여덟 게송의 품>에 있는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과 <싸리뿟따의 경>이 그것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이 부처님의 출가동기를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싸리뿟따의 경>은 출가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 즉 수행의 당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숫타니파타를 편집한 분이 이 두 경전을 15번째와 16번째에 이웃하여 배치한 데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당신이 출가한 이유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세존]: 잦아드는 물에 있는 물고기처럼 전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에게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 어디나 견고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방향이든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머물 처소를 찾았지만, (두려움에) 점령되지 않는 곳을 보지 못 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혐오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보기 어려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보았습니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4 여덟 게송의 품
부처님은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이 휘두르는 폭력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왕자 고따마는 현실의 혼란과 고통을 넘어서는 진리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사람들의 심장에 박힌 번뇌의 화살을 뽑기 위해, 그리고 진정한 기쁨과 해탈의 길을 찾기 위해 부처님은 왕자로서 누릴 명예와 부귀를 버린 것입니다. 부처님은 집을 나서서 자신이 해야 할 수행의 당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세상에는 묶여진 속박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들을 꿰뚫어 보고, 자신을 위해 열반을 배워야 한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
수행을 통해 탐욕과 분노를 넘어서거나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세상의 현실이 가혹하고 미움과 분노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한 까닭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귀한 길이지만, 자기의 문제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멀고 힘든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욕망의 불이 꺼진 고요함(열반)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좌절과 불안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싸리뿟따는 부처님의 상수제자로서, 우리에게는 사리불 장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사리불이나 아난, 가섭 등 생전의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했습니다. 대승의 논사들이 이렇게 한 데에는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러나 실제 역사가 전하는 진실은 다릅니다. 부처님은 싸리뿟따를 가리켜 '당신이 굴린 위없는 가르침의 바퀴를 굴릴 사람'이며, '여래를 닮은 자(여래의 계승자)'라고 말했습니다. <싸리뿟따의 경> 첫 머리에 보면, 싸리뿟따는 모든 수행자들을 대신하여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질문을 합니다.
1) 수행승은 싫어하여 떠나서 나무 아래, 혹은 묘지나 산골짜기의 동굴 속에 아무도 없는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높고 낮은 거처가 있지만, 수행승이 고요한 곳에서 지내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곳에 얼마나 많은 두려운 일이 벌어집니까?
2) 아무도 가보지 않는 곳으로 가는, 수행승이 외딴 곳에 기거하면서 이겨내야 하는 얼마나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까?
- <싸리뿟따의 경>/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4 여덟 게송의 품
위 1) 구절에 나오는 <싫어하여 떠나서>라는 말은 세상의 탐욕과 미움을 싫어하여 집을 떠난(원리 遠離, 또는 염리 厭離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를 가리킵니다. '원리'나 '염리'에는 세속을 떠나는 것 이상의 깊은 수행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싸리뿟따가 올린 1) 번과 2) 번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1) 슬기로운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한계를 알아 유행하며, 다섯 가지 위험한 것들 즉, 공격하는 곤충, 기어가는 뱀, 약탈하는 사람들과 야생의 동물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두려워할 만한 것들이 있을지라도, 착하고 건전한 것을 추구하여, 다른 두려움들도 이겨내어야 한다. 질병을 만나고, 굶주림에 처하더라도 참아내고 추위와 무더위도 참아내야 하리라. 도둑질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 마음의 혼란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곧 악마의 동반자라 생각하여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분노와 교만에 지배되지 말아야 하고, 그것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자신을 확립하여야 한다. (중략)
2) 외딴 곳에 거처하더라도 불만을 참고, 수행자는 네 가지 비탄(슬픔)의 현상을 견디어 내야 한다. ‘나는 무엇을 먹을까?’, ‘나는 어디서 먹을까?’, ‘나는 참으로 잠을 못 잤다.’, ‘오늘 나는 어디서 잘 것인가?’
- <싸리뿟따의 경>
<싸리뿟따의 경>은 집을 떠나 수행하는 탁발수행자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야생동물과 이교도의 위협 속에서 지냈으며, 먹고 자는 당장의 고통에서 슬픔과 외로움을 겪었습니다.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겪었던 수행자의 삶은 오늘 우리의 처지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싸리뿟따 장로의 질문은 이 시대의 수행자들에게 수행의 근본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생존의식은 매우 완고하며 자기중심적입니다. 배고픔과 수면, 추위와 더위, 그리고 명예와 환대 등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슬픔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욕망이 이루어지면, 생존의식은 쉽게 게을러지고, 혼침에 떨어집니다. 욕망과 고통의 경험은 무의식적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낳습니다. 그래서 생존의식은 갖가지 망상(사념)을 일으키고, 나아가 욕망을 채울 거짓(위선과 악행)마저 꾸며냅니다. 의식(意識)이 욕망과 집착에 매여 있으면 성찰할 수 있는 지성(知性)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다음은 싸리뿟따가 1)과 2)의 질문에 이어 다시 부처님께 질문한 내용입니다.
3) 수행승이 정진한다면, 그의 언어 형태는 어떠해야 하고, 세상에서 그의 행동 범주는 어떠해야 하고, 그의 규범과 금계(禁戒: 하지 말아야 하는 계율)는 어떠해야 합니까?
4) 마음을 통일시키고, 현명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어떤 공부를 해야 자기에게 묻은 때를 마치 대장장이가 은의 때를 벗기듯, 씻어 버릴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3)과 4)의 질문에 이렇게 법문을 했습니다.
3) 세상에서 만족을 위해, 분량을 알아, 적당한 때 음식과 옷을 얻고, 그것들 가운데 몸을 수호하고, 마을에서 조심해 거닐고, 괴롭더라도 거친 말로 대꾸해서는 안 된다. 눈을 아래로 뜨고, 기웃거리지 않으며, 선정에 들어 확연히 깨어있어야 하고, 삼매에 들어 평정을 닦아, 사념의 경향과 악행을 끊어버려야 한다. 새김을 확립한 자는 충고를 들었다면, 기뻐하고 청정한 삶을 사는 동료들에게 마음의 황무지를 버려야 하리라. 때에 맞는 착하고 건전한 말을 하고, 사람들이 뒷공론하듯 사유해서는 안 된다.
4) 또한 세상에는 다섯 가지 티끌이 있으니, 새김을 확립하고 그 제어를 배워야 하니, 즉, 형상, 소리, 또한 냄새, 맛, 그리고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야 한다. 수행승은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잘 해탈시켜, 이런 것들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고, 적당한 때 올바로 가르침을 바르게 살피고, 마음을 통일하여 암흑을 제거해야 하리라.”
- <싸리뿟따의 경>
부처님은 무엇보다 생존의식이 일으키는 탐욕과 두려움을 참고 견뎌내라고 가르쳤습니다. 탐욕과 두려움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강한 충동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탐욕을 참아낼 때 우리의 마음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성찰의 지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내(인욕)는 악행을 피하고, 마침내 성찰을 얻는 수행입니다. 남에게 보여주는 인내나 고통의 극한까지 참아내는 것은 고행주의자의 수행일 뿐, 불교의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3)번에서 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세상의 풍조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인문학과 종교의 역할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의 답변에서 보듯이, 부처님은 탐욕을 잘 살펴 마음을 잘 해탈시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그리고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야 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분노와 교만을 떠나야 합니다. 불교는 누구나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탐욕과 교만을 있는 그대로 탐구합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을 감추고 은폐하는 위선이나 기만을 경계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모임인 포살과 자자는 불교의 성격을 잘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더라도, 세상의 혼란은 탐욕 분노 폭력 미움 거짓 위선에서 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10년, 20년 앉은 수행자에게서도 여전히 같은 번뇌가 있는 것을 볼 때는 과연 수행이 무엇을 위한 수행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는 일은 거창하게 우주를 논하거나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논하는 일보다 작고 사소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고 사소해 보이는 길을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은 걸었습니다. 끊임없이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며,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는 수행은 고요한 평화를 얻는 진실한 나침반입니다. 부처님의 출가동기와 수행의 이상(열반)은 인간의 가치가 무너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수행의 의미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여운 2016.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