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의 부처님을 그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법당에서 익숙하게 만난 불상은 숭배의 대상이라 겉모습에서 인간적인 이미지를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대개 점잖고 얼굴이 원만합니다. 미소가 그윽하며, 불상의 얼굴은 살이 알맞게 붙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 태국이나 동남아시아 절에서 보는 부처님은 젊고 날씬합니다. 어떤 불상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부처님은 실제로는 35살에 깨달은 이가 되어 80세까지 살았으니, 젊은이의 모습에서 주름이 깊고 등이 구부러진 노인의 형상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출가 후 6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나이는 35살입니다. 비록 6년 간 고행을 했지만, 29살까지 왕궁에서 자란, 요사이로 말하자면, 귀한 왕가의 청년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 부처님의 모습을 본 사람은 당시 마가다국의 왕 빔비싸라였습니다. 왕은 젊은 수행자를 보고 그 태도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청정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할 뿐 아니라 멍에의 길이만큼 앞만을 본다. 눈을 아래로 뜨고 새김을 확립하고 있다. 그는 천한 가문 출신이 결코 아니다. 사신들이여, 그를 쫓아가라. 저 수행승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 <출가의 경>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3장 큰 법문의 품
이제 막 왕궁에서 나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청년(30세 초반이겠지요)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청년 수행자는 아름답고 건장하고 걸음걸이도 우아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오직 눈을 아래로 뜨고 조용히 걷고 있습니다. 이윽고 사신들의 안내로 빔비싸라 왕은 고따마(고타마)와 서로 얼굴을 맞댑니다. 젊은 수행자를 본 왕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빔비싸라] ‘당신은 아직 어리고 젊습니다. 첫 싹이 트고 있는 청년입니다. 용모가 수려하니 고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받으십시오. 묻건대, 당신의 태생을 말해 주십시오.’
[세존]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중턱에 한 국가가 있습니다. 꼬쌀라 국의 주민으로 재력과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씨족은 ‘아딧짜(태양의 후예)’라 하고, 종족은 ‘싸끼야(석가)’라 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재난을 살피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평안)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고자 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 <출가의 경>
우아하고 용모가 수려한 청년 수행자는 왕에게 자신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위험(재난)을 보고 출가하였으며, 그것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안을 목표로 정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감각적 쾌락을 얻기 위해 이를 보장해줄 부와 권력과 명예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을 뜻합니다. 저는 <출가의 경>을 읽으면서 두 가지 경이로운 점을 부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청년 수행자는 탐욕과 분노와 폭력 등을 세상의 고통으로 보았으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집착을 그 원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반 수행자들이 추구하던 전생에 대한 지식이나 초자연적 자아 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재난으로 파악하고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서른 살 초반의 청년 수행자의 순수하고 진지한 문제의식에 대해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마저 느낍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부처님이 세운 승단(상가)의 성격입니다. 당시 바라문교나 일반 수행자들은 해탈이나 축복을 얻기 위해 전생의 숙명이나 미래를 보는 신통력을 얻거나, 또는 하늘의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부처님은 주문을 외워 복을 빌거나, 제사를 지내 전쟁의 승리를 빌어주던 당시의 브라만 종교가들을 비판했고, 갠지스 강가에서 목욕을 하거나, 불을 피우는 수행자들을 헛된 짓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오직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등을 살피는 내적 성찰을 통해 마음의 평화(열반: 욕망의 소멸)를 추구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따마 부처님 당시의 승단은 주문을 외우고 장엄한 제식에 익숙한 오늘 우리 불교의 현실과 거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의 지도자가 신통력을 갖추면 추종자가 줄을 잇습니다. 교주는 추종자들에게 부와 명예를 약속하고, 자신은 재물을 모읍니다. 추종자는 교주의 신통력으로 미래의 부귀를 보장받은 듯 한 착각을 합니다. 추종자와 교주는 서로 유혹과 집착으로 묶여 있습니다. 소위 신통력이 있는 교주나 스승을 따르는 곳에서는 아무리 법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모여있다 하더라도 내적 성찰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 지혜가 높은 싸리붓따(사리불)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만난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스승의 가르침을 들은 것은 헛되지 않았다. 나는 속박을 끊고 번뇌에서 벗어났다. 실로 내가 얻고자 바랐던 것은 전생에 대한 지식도 아니고, 미래를 내다보는 눈도 더욱 아니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도 아니고, 죽은 후에 다시 어느 곳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지식도 아니며, 보통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 초능력에도 있지 않았다.
수행자는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말할 때에 절제하며, 자만을 버려, 바람이 나뭇잎을 날리듯 악한 성품을 걷어낸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죽을 때도 주의 깊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몸을 버리리라.
- 장로비구의 시(테라가타), 싸리붓따 편, K.R. Norman 영역, PTS, 996-1006 요약
수행자 고따마는 29살에 집을 나섰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들 라훌라를 둔 가장입니다. 그가 왕자로서 지내는 동안 궁중에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미움 분노 폭력 탐욕 등을 고려하면 그 실상은 오늘 우리 삶의 현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고통은 인류의 오랜 짐입니다.
감각적 쾌락이 추구하는 욕망과 집착은 유혹이 강해 빠지기는 쉬워도 맞서기는 어렵습니다. 욕망과 집착을 재난으로 인식하고 거기에 맞서 자유의 길을 찾고자 결심한 29살 청년 고따마는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는 왕자의 명예와 부귀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출가자가 되어서도 명예와 환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권위나 신통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내면의 혼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성찰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여운 2016.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