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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화두

보시의 완성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7.03.12|조회수134 목록 댓글 0

기부 또는 보시는 요사이는 '나눔'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눔의 반대말은 '인색'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것을 인색이라고 하는데, 인색은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이 자주 법문에 올린 주제입니다. 재물이나 보화에 집착하면 가난한 이웃에 인색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많은 재물을 들여 제사를 지내면서도 유행자나 거지 유랑민 등 가난한 사람에게 인색한 당시 귀족이나 바라문들을 비판했습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사회적 행위입니다. 사람이 지구에 혼자 산다면 소유라는 개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나눔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주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받는 사람이 자칫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받는 사람을 더욱 구차하게 만드는 보시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보시는 어두운 그림자를 남깁니다. 


최근 상영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은퇴한 한 영국 노인(다니엘 블레이크)이 정부의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은 가난하지만, 자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한 노인입니다. 다니엘이 만난 실업급여 담당 공무원들은 친절하지만, 매뉴얼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취업안내소 강사는 실업자는 많고 취업 기회는 적은 현실이 '팩트(fact)'라고 강조하며, 면접에서 고용주의 관심을 끄는 대답을 하는 요령을 가르칩니다. 인터넷으로 이력서를 쓰는 데 지친 주인공이 손으로 쓴 이력서를 제출하자 취업담당자는 규칙 위반이라고 경고합니다. 경고를 받은 사람은 복지 지원을 한동안 받을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인간으로서 비참함을 느낍니다. 복지정책이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영화는 사람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복지정책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의 장례식장에서 영화는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대신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나눔은 무엇보다 주는 사람이 자신을 깊이 성찰할 때 완성됩니다. 진정한 나눔은 불교의 무주상보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주상(無住相)보시는 세 가지 집착(상 相)이 없는 보시입니다. 즉, 주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주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존엄을 지켜주며, 주는 물건의 값어치에 대한 교만도 없는 보시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주는 사람은 도덕적 보상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축복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보면 모두 탐욕이요, 아상(我相)입니다. 

​욕망을 넘어 나누는 일은 도가(道家)에서도 중요한 화두입니다. <장자(莊子)> 천지편에는 시골 변방을 지키는 파수꾼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임금은 화(華)라는 지방에 갔다가 파수꾼을 만났습니다. 파수꾼은 성인으로 알려진 요임금에게 오래 살고 부자가 되고 아들을 많이 낳으라고 축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임금은 군자답게 이 모든 것을 사양했습니다. 요임금에게는 '이기심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극기복례 克己復禮)'이 성인의 길입니다. 


파수꾼이 말했다.
"오래 살고, 부자가 되고,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임금 홀로 그것을 원하지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요임금이 말했다.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일이 많아지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아집니다.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어서 사양하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말했다.
"처음에 나는 당신을 성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군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군요. 하늘은 사람을 낳으면, 모두에게 합당한 직분을 줍니다. 아들이 많다 해도 그들에게 직분이 주어지는데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부자가 된다 해도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무슨 근심이 되겠습니까?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고, 병아리처럼 적게 먹으며, 새처럼 날아다니며 행적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만물과 더불어 번창하지만,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덕이나 닦으면서 한가히 지냅니다. 이렇게 살면, 몸에는 늘 재앙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욕된 일이 있겠습니까?"
- 장자 외편 천지(天地)편  

 

요임금은 유학(儒學)의 군자를 상징합니다. 변방의 파수꾼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 도가(道家)의 인물입니다. 파수꾼은 욕망을 극복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찾으라고 합니다. 만물에는 제각기 자연적 질서(道)가 있다고 강조하며, 자연의 길을 따르면 현실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파수꾼, 즉 도가는 욕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위선이 일어나고, 예절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유교의 모순과 혼란을 본 것입니다.




파수꾼은 메추라기 병아리와 새 등 세 가지를 들어 도가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즉, 성인은 메추리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고, 병아리처럼 적게 먹습니다. 사람의 위장을 보면, 먹는 양에 타고난 한정(명 命)이 있습니다. 기름진 것을 먹는다고 몸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집이 아무리 크고 호화로워도 잠을 잘 때는 알지 못 합니다. 자연적 한계를 지키면 소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인은 새처럼 날아다녀, 자취를 남에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거나 남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사물에는 타고난 자연적인 질서가 있으며, 이 길(道)을 따르면 재앙이나 욕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메추라기나 병아리와 새가 사는 세상에서는 굳이 보시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보시를 논하는 현실도 결국 사람이 자연의 한계를 지키지 않아 일어나는 인위적인 갈등입니다. 결국 가장 자연스러운 나눔은 옹달샘과 같지 않을까요? 옹달샘은 누가 마셔도 개의치 않습니다. 물이 넘치면 밖으로 흘려 보냅니다. 옹달샘은 그냥 두면 저절로 그렇게 합니다. 다만 사람이 물을 더 채우기 위해 샘의 턱을 높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소박한 세상에서는 나눔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도 대낮에 촛불을 드는 것과 같이 어색한 일입니다. ​노자(老子)는 참으로 듣기 어려운 말은 '자연'이라고 탄식했습니다(희언자연 希言自然 - 도덕경 23장).


우리 작은손길은 지난 13년 동안 보시바라밀을 수행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육바라밀은 깨달음에 이르는 여섯 가지 길입니다. 그러므로 육바라밀의 첫 째인 보시바라밀은 단순히 재물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입니다. 부처님은 보시하는 자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법문했습니다.

 

보살은 어떤 대상에도 집착이 없이 보시해야 한다, 말하자면 형색에 집착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집착없이 보시해야 한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하되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대상에 대한 관념에 집착없이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금강경 제4 묘행무주분


보시하는 자에게는 늘 명예와 칭송의 유혹이 따라 다닙니다. 전륜성왕의 성스러운 모습(32상)은 누구나 얻고 싶어 하는 명예와 칭송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전륜성왕을 추구하는 마음의 본질은 곧 교만과 아집이라고 금강경은 가르칩니다.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주는 물건도 모두 꿈과 같고 아지랑이 같이 보아야 진정한 보살입니다. 교만과 아집은 세상의 모든 법이 공(空)하며 무아(無我)인 진리를 기억하고 깊이 새길 때 사라집니다. 보살이 이렇게 보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다음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옛날 한 수행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언제 천지가 개벽하여 세상 사람이 다 잘 사는 때가 올까요?”

“네 이웃이 형제로 보일 때 개벽이 온다."

 

형제는 너와 나의 체면이나 손익을 따지지 않는 사이입니다. 무주상보시는 보시하는 사람이 교만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받는 사람 또한 두려움과 짐을 내려놓게 합니다. 보시하는 자기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수행이야말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완전한 보시(보시바라밀)입니다. 끝으로 금강경의 무주상보시 법문에 대해 야부선사가 붙인 게송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야부

西川十樣錦에 添花色轉鮮이로다 欲知端的意인덴 北斗面南看하라

虛空不閡(애)絲毫念하니 所以彰名大覺仙이라하노라


서천(인도)의 열 무늬 비단(十樣錦)에

꽃을 수놓으니 색이 더욱 곱구나.

분명한 뜻을 알고자 하면,

남쪽을 향해 북두칠성을 보라.

텅 비어 털끝만한 생각에도 걸림이 없으니

이런 까닭에 대각선(大覺仙)이라 높여 부른다.

-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 야부송



(여운 2017.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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