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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1월 6일 모임을 마치며 -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1.07|조회수35 목록 댓글 0

어제 새해 첫 [법과 등불]모임은 여러 회원님들의 진지한 대화속에 

잘 회향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스승 부처님이 어떤 고뇌 속에서 출가했는지 

그 생생한 고백을 우리 나름대로 사색하고 그 고뇌에 동참하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부터 공포가 생깁니다. 싸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잦아드는 물에 있는 물고기처럼 전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에게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 어디나 견고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방향이든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의 처소를 찾지만, (두려움에) 점령되지 않는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혐오가 생겨났습니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은 혐오(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왕궁 안에서의 권력싸움을 상상할 수 있고,

암베드 까르가 주장한 것처럼, 부처님 나라와 다른 나라가 물의 사용권을 놓고

전쟁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쓰며 <상대방을 중상 모략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부렸으며, 상대방을 업신여겼습니다.>

 

폭력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경험한 부처님은 이러한 현실에 혐오를

느끼고 출가했습니다. 출가의 의미를 부처님은 <멀리 여읨>- (염리(厭離) 또는

원리(遠離))로 표현했습니다. 결별 즉 <멀리 여읨>을 통해 부처님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열반)을 추구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묶여진 속박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들을 꿰뚫어 보고, 자신을 위해 열반을 배우라.’

 

부처님의 <여읨>은 부처님 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진지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 이후 가장 뛰어난 논리학과 언어철학자입니다. 아버지가 유럽의

철강왕이라 부를 정도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지만, 그는 가난한 예술가와 주위에게

유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대신 그는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을 탐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존 라빈슨은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제조업체 베스킨라빈슨 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버지 어브 라빈스의 유산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아이스크림을 해로운 음식으로 규정하고, 식생활과 환경,

건강의 연관성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로 각종 유제품과 축산물에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유산을 포기한 댓가로 그는 평생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 또한 집을 떠나 비록 왕자의 지위를 포기했지만, 평생 인간의 고통을

탐구하며 수행자로서의 자유와 해탈의 길을 걸었습니다. 

부처님은 상대방을 중상 모략하는 거짓, 물질적인 탐욕과 인색함, 그리고

상대방과 자기를 비교하는 교만에서 폭력이 일어난다고 파악하고, 여기서

멀리 떠나라고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고, 물질에 애착을 갖지 말고, 교만을 두루 알아서,

폭력을 삼가며, 유행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도 익숙한 일입니다. 폭력에 익숙한 삶은 우리의 의식을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모임에서 우리는 특히 <졸음 해태 혼침>의 원인에 대해

법담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의식 또한 이 세 가지 장애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반에 둔 사람이라면 졸음과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고,

방일을 일삼아서도 안 되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법담을 통해 우리의 의식이 생존의 욕망에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자아의식과 생존의식의 성격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졸음과 해태와 혼침은 우리 생존의식의

뿌리깊은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사색과 성찰이 필요한 화두입니다.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에 대해서 내 것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세상에서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것>에 잡착하는 자아의식은 탐욕, 교만, 비교를

통해 다양한 형태(언어 신체 생각)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집착합니다. 그래서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비교를 멀리 떠나 교만에서 벗어납니다.

 

질투하지 않고, 탐내지 않으며, 동요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공평하고,

두려움이 없는 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그의 공덕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자신이 동등자 가운데, 열등자 가운데, 또는

우월자 가운데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요하고, 관대하고, 얻거나 잃어버리거나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싫어하여 멀리 여읨>을 통해 고통을 성찰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재(오온)를

탐구하여 무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탐욕, 교만, 비교를 멀리하며 <고요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을 읽으며, 숫타니파타에서 자주 강조하는 부처님의 가르침

<멀리 여읨>과 <적멸>의 심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경을 마주하는 큰 행복은 부처님의 생생한 고백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의 고백은 2,5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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