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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6월 1일 모임 - <성자의 경> 안내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6.01|조회수55 목록 댓글 0

6월 1일 공부하는 경전은 <숫타니파타> 뱀의 품 가운데 마지막 장인 <성자의 경>입니다. <성자의 경>에서 말하는 '성자'는 부처님의 제자들 특히 부처님을 따라 집을 나와 수행하는 출가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성자의 경>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공부했으며 어떻게 수행했는지, 이른바 불교의 본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경전을 보면, 지배종교인 바라문 외에도 선정을 내세우는 종파와 고행을 강조하는 파 등 다양했숩니다. 전쟁과 가난 등으로 세상이 혼란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 중에 이제 막 새로운 가르침을 펴는 한 젊은 수행자 고따마를 따라 출가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요? 부처님은 고행이나 관념적인 선정을 버리고 마음 속 탐욕과 분노를 없애는 자비와 성찰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 신도들이 붐비는 교파나, 교회 또는 사찰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교회나 절에서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고따마를 스승으로 선택한 당시 수행자들의 결단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어떤 다른 종교보다 철저하게 내적인 성찰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특징은 당시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이나 고행자들의 삶과 수행을 보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당시 외도들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졸저 <붓다를 기억하는 사람들> 중 바라문이나 외도 고행자들의 수행에 관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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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면서 고통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좋은 결과를 얻으면 누구나 기뻐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면

누구나 슬퍼합니다. 화가 고통이고 복이 기쁨인 이상, 화를 멀리하고 복을 원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부르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는 기쁘고 슬픈 일을 당하는 원인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다 같이 노력해도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재앙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복이 되는 일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화위복,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습니다.

 

화와 복을 가져오는 정확한 원인을 알기 어려울 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포기하고 초자연적인 판단에

의지하기 쉽습니다. 때로는 초자연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나 단체를 찾기도 합니다. 종교 중에는 이런 점을 악용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잘못된 종교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돈과 재물을 빼앗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부처님은 사람을 해치고 동물을 죽여 복을 비는 제사를 반대했습니다.

다음 ‘우파가경’이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줍니다.

 

우파가라는 어떤 바라문 청년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세존과 서로 인사한 뒤에 물러나 한쪽에 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고따마(구담)시여, 모든 바라문들은 항상 사성대회(邪盛大會; 제사)를 칭찬합니다. 사문 고따마께서도 사성대회를 칭찬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우파가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한결같이 칭찬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성대회는 칭찬할 만하고, 어떤 사성대회는 칭찬하지 못할 것도 있다.”
우파가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사성대회가 칭찬할 만하며, 어떤 사성대회가 칭찬할 만하지 않습니까?”
“만일 사성대회에서, 여러 마리 황소와 숫물소, 암물소 및 많은 염소 새끼와 작은 중생들을 잡아매어 모두 죽이거나 핍박하고 괴롭히며, 하인이나 머슴들을 매질로 위협하고 슬피 부르짖게 하며, 기쁘지 않고 즐겁지도 않은 온갖 고통을 가하며 부린다면, 이런 사성대회를 나는 칭찬하지 않는다. 그것은 큰 죄악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사성대회에서, 여러 마리 소들을 잡아매지 않고 죽이거나 핍박하지 않고, 하인이나 머슴들을 매질로 위협하지 않고 나아가 중생들에게 큰 고통을 가하며 부리지 않는다면, 그런 제사를 나는 칭찬한다. 그것은 큰 죄악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제4권 우파가경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제사나 제사의 형식을 띤 종교행사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을 신에게

바치는 대신 자신의 안전을 구하려는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자신의 소유 중 일부를 내놓으면 그 몇십 몇백 배를 받을 수 있다는 사고도 숨어 있습니다. 이 속에는 세속적인 거래의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작은 것을 주고 더 큰 것을 바라는 마음은 이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는 참된 이타행이나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인도의 바라문들은 복을 짓기 위해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부처님은 외도들의 복 짓기를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저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자들을 교화한다. 즉 그들은 보름날에 참깨 가루와 암라마라 가루로

온몸을 씻고 새로 지은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는 긴 실을 드리우고 쇠똥을 땅에 바르고 그 위에 누워서 말하기를, ‘선남자들아,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옷을 벗어 한곳에 두고 알몸으로 동쪽을 향해 달려가라. 설령 길에서 사나운 코끼리․모진 말․미친 소․미친 개․가시밭․숲 덤불․계곡․깊은 물 따위를 만나더라도 곧장 나아가고 피하지 말라. 그런 것들로 해를 입어 만일 죽게 된다면 틀림없이 범천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한다. 외도들은 이런 삿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지혜로 평등하게 깨달아 열반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자들을 위해 편편하고 바른 길을 연설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이 아니요, 지혜로서 평등하게 깨달음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향하는 것이니, 나는 여덟 가지 바른 길(팔정도)을 말한다.”
-잡아함경 제30권 ‘바라문경’, 동국역경원

 

부처님이 지적하시듯, 이처럼 인도의 고대 바라문들은 사람들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알몸으로 동쪽을

향해 달려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다가 짐승에게 부딪쳐 죽어도 다음 생에 하늘에 태어난다고 설득했던 것입니다. 신비한 형식을 강조한 나머지 현실을 극단적으로 무시하는 반지성(反知性)적인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종교 활동의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을 무시하는 반지성적인 가르침은 지금도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에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엇보다 지혜와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사행경(행위를 버리는 경)’을 보면, 바라문들이 지내던 제사 모습의 또 다른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바라문은 부처님에게 자신의 보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고따마여, 이와 같이 보름날 머리를 감고 제사를 지내되, 새롭고 깨끗한 긴 털로 짠 흰 천을 감고, 손에는 신선한 풀을 쥐고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보시하여 복을 짓습니다. 고따마여, 이것을 바라문들이 수행하는 사법(捨法)이라고 합니다.”
-잡아함경 제37권 ‘사행경’

 

이 구절을 보면, 당시 바라문들이 복을 얻기 위해 보시를 할 때, 어떤 형식을 갖추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감아 더러움을 버리고, 더럽고 낡은 천을 버리고 새롭고 깨끗한 한 천을 준비하는 것을 ‘버리는 법(사법捨法)’이라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해탈을 얻기 위해 특정한 강에서 목욕을 하는 바라문(잡아함경 제44권 손타리경), 벗은 몸으로 유행하는 자, 진흙을 바르는 자, 항상 위로 서 있는 자, 절식하는 자, 진언을 외우는 수행자 등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참다운 행복을 가져오는 길을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다음 법문은 위에서 인용한 ‘사행경(捨行經)’의 끝 부분입니다.

 

“죽이지 않음으로써 살생을 버리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않음으로써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음행하지 않음으로써 범행이 아닌 것을 버리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지 않은 말을 버리는 것이다.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간질하는 말을 버리는 것이다. 나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추한 말을 버리는 것이다. 꾸밈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의미 없는 말을 버리는 것이다. 탐욕의 마음이 없음으로써 애착을 버리는 것이다. 분노가 없음으로써 성냄과 원한을 버리는 것이다. 바른 견해로써 삿된 견해를 버리는 것이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성현의 법과 율에서 행하는 사법(버리는 법)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살생과 강탈, 성적인 폭력과 거짓, 욕설과 이간질, 탐욕과 성냄을 버리는 것을 참다운 버림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길이 곧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행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가르침 속에는 어떤 신비나 권위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검증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수행을 거부하고 우리 마음을 깨달아 행복한 삶을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가 당시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 <붓다를 기억하는 사람들> 240쪽 - [권위와 신비]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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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자들은 자신의 몸을 괴롭힐수록 스스로 해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과 자기 정당화에 대한 주장이 강합니다. 신도들도 오래 동안 고행을 한 성직자를 그 이유만으로 존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구경에 있는 다음 구절이 고행자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지내거나, 머리를 길게 땋거나, 흙으로 몸을 바르거나,

굶거나, 맨 땅위에 눕거나, 재를 몸에 바르거나,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어도,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 법구경 폭력의 장, 141

 


- <붓다를 기억하는 사람들>249쪽 [열가지 결박]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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