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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7월 6일 모임 <아마간다의 경>에 대한 사색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6.29|조회수48 목록 댓글 0

저는 <아마간다의 경>을 읽으며 깊은 울림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 불교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특히 불교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이런 질문을 저절로 떠올리게 됩니다. 사람 사이의 우정, 거짓과 위선을 버리는 것, 생명에 대한 연민, 자기의 몸을 괴롭히는 수행을  위선과 기만으로 볼 수 있는 통찰 등이 과연 오늘 우리 불자의 수행의 화두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전을 읽고 참선하며 다라니를 외우며 오랜 기간 가행정진하는 요즘 시대의 수행의 화두가 초기경전 숫타니파타 등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화두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끊임없이 되돌아 보지 않으면, 맹목적 권위가 인간의 양심과 보편적 지성을 억압하던 서양 중세의 암흑시대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불자로서 수행한다고 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아마간다의 경>에서 부처님이 문제삼는 삶의 고통의 실체를 함께 돌아보면, 불자로서 가지고 있는 오늘 우리의 현실인식이 부처님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욕망과 고통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면, 당연히 수행의 이상이 같을 수 없고, 수행의 이상이 다르면 현실 행동의 규범과 형태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간다의 경>은 역사 속에서 숨겨진 부처님의 순수한 원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부처님이 말씀하는 위선적인 수행에 대한 깊은 통찰은 오늘 우리가 묶여 있는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권위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나, 단식하는 것이나, 벌거벗거나, 삭발하거나, 상투를 틀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거친 사슴가죽옷을 걸치는 것도, 불의 신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를 얻기 위해 행하는 많은 종류의 고행, 진언을 외우거나, 헌공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계절에 따라 행하는 수련도 모두 의혹을 여의지 못한 자를 청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수호하고, 감관을 제어하며 유행하십시오.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온화한 것을 즐기고, 집착을 뛰어넘어서 모든 고통을 버려버린 현명한 님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 <아마간다의 경> 11 - 12번 구절

 

위 구절을 보면, 종교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오래된,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비전을 줍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아마간다의 경>을 읽는 불자가 부처님에게서 받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티브이를 보면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부르는 복면가왕(?) 예능프로가 유행입니다. <아마간다의 경>의 다음 구절을 만약 누군가가 얼굴을 가리고 외친다면, 그 사림이 과연 누구라고 상상하게 될까요? 

 

악행을 일삼고, 빚을 갚지 않고, 중상하며, 재판에서 위증을 하고, 정의를 가장하며, 이 세상에서 죄과를 범하며 비천하게 행하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살아있는 생명을 수호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하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 <아마간다의 경> 8 -  9번 구절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진지하게 탁마하게 되면, 2,500 여년 전 살아있는 고따마 싯다르타의 민낯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아가 무엇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야하는지 저절로 드러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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