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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7월 20일 모임 <부끄러움의 경>을 읽으며 - 부끄러움이 일어나는 수행 -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6.07.21|조회수127 목록 댓글 0

어제 [법과 등불]모임에서는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부끄러움의 경>을 읽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서로 탁마하다가, 문득 백락천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백거이(772-846)는 중국 중당시대(中唐時代)의 시인이다. 자는 낙천(樂天)이며 시호는 문(文),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백락천이 지은 글로는 비파행과 장한가가 특히 유명하다. 불교와 노장에 식견이 있었던 백거이는 글을 쓰고 나서는 늘 여염집 노파에게 평을 청했다. 글은 보통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백낙천이 지은 시 <춤과 노래(歌舞)>이다. 이 시를 보면, 그의 사람됨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다. 

 

한 해가 다 저문 장안성에

큰 눈이 온 성을 덮었네

눈 속에서 대궐을 나서는 사람들

울긋불긋 관복입은 귀족들이구나

귀족들은 바람과 눈을 맞아 흥이나 있고

부자들은 춥고 배고픈 걱정이 없구나


이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오직 큰 집이요

하는 일이라곤 놀러 다니는 일이네

화려한 대문에는 수레 탄 손님들이 드나들고

누각에는 촛불 밝혀 노래하고 춤을 추네

기쁨이 넘쳐 서로 무릎을 맞대고

술이 취하매 옷 벗고 노는구나


이 집 주인은 법관이니

관리들이 윗자리를 차지하네

대낮부터 취하여 즐기더니 

밤이 깊어도 끝 날 줄 모르구나

이들이 어찌 알까! 시골 감옥 속에

얼어 죽은 죄수가 있는 줄을


백낙천은 자신을 위해 양졸(養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시 속에는 세상 물정에 흔들리지 않고 살려는 자신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평소 노자도덕경을 즐겨 읽었다.

 

養拙(양졸: 바보처럼 살리라)


쇠가 무르면 칼을 만들지 못하고

나무가 굽으면 멍에로 쓰지 못하리

지금의 내 모습이 또한 이와 같아서

어리석고 아둔해 출세가 어렵구나 


기꺼이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자취를 끊고 시골로 돌아가야지

초가집에 편안히 살면서

거문고와 술잔을 벗하리라 


몸은 세속의 틀을 벗고

귀는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 안 듣고

일 없이 소요하며  

때때로 도덕경을 읽으리라


근심이 없어 본성을 즐기고 

욕심을 줄이니 마음이 맑아지네

이제야 알겠노라! 바보가 되어야

비로소 도를 닦을 수 있음을  
 

백락천이 항주 자사(刺史)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항주 근처의 사찰에 도림(道林)이라는 이름난 고승이 있었다. 도림선사는 소나무 위에 올라가 좌선을 하는 일이 많았다. 선사의 모습은 마치 새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해서 사람들은 도림선사를 조과선사(鳥菓禪師 새둥지 선사)라고 불렀다. 불경에도 해박했던 백락천은 소문을 듣고 도림선사를 찾아갔다. 조당록에는 백락천과 도림선사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락천이 나무 위에서 좌선하는 도림선사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도림선사는 위에서 답했다.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말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백락천이 말했다.

“이 정도 말은 세 살 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도림선사가 대답했다.

“세 살 난 아이들도 다 알고 있지만, 팔 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백락천은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백락천과 도림선사의 대화를 보면, 새삼 앎과 삶의 괴리라는 화두를 보게 된다. 세상사에 대해 비판적인 백락천으로서는 현실에서 늘 안고 있는 화두가 바로 이 앎과 삶의 괴리가 아니었을까? 그는 늘 도연명처럼 귀거래를 꿈꾸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밖으로 명예와 부귀를 추구하는 한, 스스로 보기 어렵다. 관념적인 앎은 그러므로 위선과 기만을 낳기 쉽다. 현실의 갈등을 경험하지 않은 지식은 도식적인 해석이나 추상적인 이상에 집착하기 쉽다. 도림선사의 말은 백락천에게 실천이 없는 이상의 허구를 일깨우고 있다. 도림선사의 말은 법구경에 나오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諸惡莫作 제악막작

衆善奉行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정기의

是諸佛敎 시제불교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실천하되,

스스로 그 마음을 맑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다. 


불교는 자신의 욕망을 성찰하여, 악에서 벗어나기를 가르치고 있다. 백락천이 도림선사의 말을 듣고 스스로 가슴을 친 것은 자신의 지식적 위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부처님은 무엇보다 부끄러움을 강조하였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나는 당신의 친구다.’라고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 그는 친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친구에게 실천 없이 사랑스런 말만 앞세운다면, 현명한 자들은 그에 대해서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자라고 알아야 합니다. 

훌륭한 결과를 바라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적당한 짐을 지고, 기쁨을 낳고, 칭찬을 받으며, 안락을 가져 올 조건을 닦습니다. 멀리 여읨의 맛을 누리고, 고요함의 맛을 누리고, 진리의 기쁨이 있는 맛을 누리는 사람은 고뇌를 떠나고 악을 떠납니다.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2 작은 법문의 품 3. <부끄러움의 경> (일부)

 

친구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힘든 일이 생기면 외면하고, 우정을 강조하면서도 친구의 결점만을 본다면 위선이다. 위선은 내적으로는 자기자신을 속이는 기만이기도 하다. 인간이 위선을 그치지 않는 까닭은 그 속에서 얻는 소유와 명예의 쾌락이 크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위선과 기만을 돌아볼 때 일어난다. 형식과 테크닉에 집착하면 아무리 훌륭한 수행을 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보기 어렵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법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자기의 부끄러움을 말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부끄러움을 자각한 불자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 부처님은 욕망을 멀리 여의는 데서 오는 기쁨의 맛(멀리여읨의 맛), 고요함의 맛, 진리의 맛을 본다면 이 모든 허위와 기만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이 맛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실제 욕망을 버릴 때 얻어지는 기쁨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지금 여기서 욕망을 버리면 기쁨과 칭찬과 안락을 얻는 길을 보여준다. 

(여운 2016.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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