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법과 등불] 모임에서 <위대한 축복의 경>을 잘 공부했습니다. 이 경을 번역한 퇴현 전재성 박사에 따르면, 상좌부 불교권인 동남아시아에서는 모든 행사에 으레 이 경전을 독송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 경의 마지막 구절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는 부처님의 말을 새겨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은 초기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성립된 <숫타니파타>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경전을 읽으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재가불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재가불자의 진정한 이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초기 경전이 진솔하고 높은 이상을 일깨우지만, 이 경은 특히 깊은 감동을 줍니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비교적 짧습니다. 원전과 다르게 번호를 표시하고 단락을 나눈 것은, 경전을 문맥에 따라 이해하기 쉽도록 제가 임의로 정한 것입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 때 마침 어떤 하늘나라 사람이 한 밤중을 지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제따 숲을 두루 비추며 세상에서 존귀한 님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다가와서 그 하늘사람은 세존께 시로써 이와 같이 말했다.
[하늘사람]
“많은 하늘나라 사람과 사람들, 최상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행복에 관해 생각하오니, 최상의 축복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소서.”
[세존]
“(1)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2)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3)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고, 친지를 보호하며,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4) 악한 행위를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5)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6)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2 작은 법문의 품, 4. <위대한 축복의 경 > 전문
<축복>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입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나 이 용어를 쓸 때는 신으로 부터 받는 가호를 뜻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대신 축원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도 불보살의 가피나 스님이 복을 빌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축복의 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의미는 아주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축복>은 스스로 노력에서 바른 행위를 할 때 얻어지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축복의 경>은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재가자가 실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부처님이 설하는 경전입니다.
경 첫 머리에는 하늘나라 사람(천인)은 최상의 행복을 가져오는 오는 길이 무엇인지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이 질문 자체는 행복을 가져오는 길을 묻는 일반적인 질문으로 볼 수 있지만, 이 경전이 초기 부처님 시대에서 설해진 이상, 당시의 현실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바라문과 여러 사상가들(고행자, 명상가, 또는 회의주의자) 앞에서 새로운 사상을 펴는 젊은 사문 붓다(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가르침은 행복을 가져오는 참된 친구(선지식)가 누구인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1)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부처님은 무엇보다 최상의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사귀지 말고, <슬기로운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이며, 슬기로운 사람과 존경할 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초기경전을 이해한 바탕에서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숙명론자나 회의론자입니다. 모두 당시 새로운 사문들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고행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고행주의자나, 제사를 지내면 행복이 온다고 믿는 바라문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행복(열반)을 구하며, 나아가 연기법을 깨닫는 가르침을 폈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는 <슬기로운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의 원인과 결과를 믿는 사람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훌륭한 출가자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아라한)'으로 표현합니다. 부처님은 물론 뛰어난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으로 공경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은 행복을 가져오는 첫 째 조건으로 연기법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 즉 부처님과 그 제자를 선한 친구(도반)로 사귀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부처님은 욕망을 줄이고 선한 공덕을 쌓는 행위가 행복을 가져온다고 가르칩니다. 구체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주거(집)에 대한 가르침부터 시작합니다.
2-1)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아야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큰 집과 하인과 소, 말, 보석과 자식에 욕심을 품으면 남에게 보시하여 공덕을 쌓을 여유가 없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행복을 가져오는 직업윤리에 대해 말합니다.
2-2) 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자신의 생계에 필요한 기술을 많이 익히고 훈련하는 것은 불방일, 즉 부지런히 배우고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의미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만, 일터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세 번째 가르침은 가정과 친척 그리고 이웃에서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재가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3-1)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부모를 잘 모시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의 행복을 가져오는 일이며, 재가자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경전(쌍윳따니까야)에는, 한 때는 부유해서 재물을 자식에게 물려주었지만, 늙어서 자식에게 버림을 받은 한 늙은 바라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을 찾아 자기의 처지를 호소했습니다. 부처님은 그 늙은 바라문에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읊으라고 다음과 같은 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늙은 바라문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시를 외웠습니다.
“내가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들을 키웠지만
그들은 아내들과 모반하여 나를 개가 돼지를 몰아내듯 쫒아내었소.
아들의 형상을 한 야차들이 나이든 늙은이를 버리네.
늙은 말이 여물도 없이 말구유에서 쫓겨나듯이
나는 자식들의 늙은 아버지이지만 다른 집에서 밥을 빌어먹고 있다오.
불효한 자식들보다 지팡이가 나에게 더욱 의지가 된다오.
어둠 속에서 앞으로 가고 캄캄한 밤에서도 바닥을 찾으니
지팡이의 힘에 의지해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네.”
- 쌍윳따니까야 7:14(2-4) <대부호의 경>(요약)
이웃의 비난이 거세지자 결국 아들은 부모를 모셔옵니다. 부모와 자식을 돌보라는 위 3)번 구절의 두 번째 문장을 보면, 부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부처님은 친척과 이웃에게 보시를 베풀라고 하며, 이러한 삶이 곧 정의로운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친지를 외면하면, 현명한 자들로 부터 비난을 받으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3-2)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고, 친지를 보호하며,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이웃과 친척을 보호하고 나누어 주며 정의롭게 살아야 행복이 온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자연이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신이나 가문의 축복을 기원하는 바라문의 가르침과는 아주 다릅니다.
네 번째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는 일입니다. 술을 마시거나 주문을 외우거나 고행을 하는 수행자를 가까이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 악한 행위입니다.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금기와 미신적인 관습도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4-1) 악한 행위를 싫어하여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악한 행위를 멀리하고 난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에는 만족과 감사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당시는 아직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 귀부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날 법문을 사양하고 돌아섰습니다. 나중에 그 부인이 마음을 고쳐 낮은 자세로 앉았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설법을 허락했습니다.
4-2)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는 나아가 수행자를 만나서 진지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담마(부처님의 가르침)를 논의해야 합니다.
4-3)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서로 공개적으로 논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권위적일 때에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제사와 주문을 전수하는 바라문 종교에는 오직 바라문 종족끼리만 전하는 비밀과 권위만 있을 뿐,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합니다. 부처님은 존경과 이해로 인내심을 가지고 수행자와 진리를 논의할 때 행복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4)번 구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는 일에서부터 법문을 듣는 마음가짐, 그리고 마지막에는 법담을 나누는 과정까지 법문을 공부하는 단계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의 치밀한 사유와 관찰이 느껴집니다.
다섯 번째는 재가자의 수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재가자에게 진리(사성제: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를 관조하여 열반을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열반은 번뇌를 여읜 고요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반은 출가자만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5-1)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재가자가 번뇌를 이기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욕망과 유혹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에서 말하는 열반은 재가자가 삶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집착을 살펴, 참고 버리고 이겨내서 얻는 소박한 적멸(고요함)입니다. 초기불교에는 이처럼 승속의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혀도 <슬픔>없이 지낼 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합니다.
5-2)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슬픔은 뜻이 깊습니다. 다음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에서 우리는 슬픔의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명색(정신과 신체)에 대해서 '내 것'이라는 것이 전혀 없고,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세상에서 잃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또는 '이것은 어떤 다른 자의 것이다' 하는 생각이 없다면, '내 것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는 '나에게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 16, 17 게송
슬픔은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일어납니다. 거룩한 진리(사성제)를 관조하면 마침내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내 것'이 없는 무아의 진리를 깨달아 슬픔을 이겨내면 행복이 온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 재가자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해탈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해지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게 됩니다.
6)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1)번 구절은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누구를 가까이 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즉, 참된 선지식(좋은 친구)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2)번 구절은 행복을 가져오기 위해 취해야할 주거와 직업에 대한 가르침, 그리고 3)번은 가정과 친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정의로운 나눔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가르침입니다. 4)번 구절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고 나아가 깊이 이해하여, 마지막으로 수행자와 법을 논의하는 과정을, 이어 5)번 구절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얻고 슬픔에서 벗어나는 수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6)번 구절에서는 재가자가 이렇게 살면 어디서나 실패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행복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바라문의 가르침 즉, 제사나 주문을 외우는 신비적인 기복행위를 멀리 떠났으며, 인과를 무시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거부하는 회의론자의 주장이나, 물이나 불을 섬기는 고행자의 가르침과도 멀리 떠나 있습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이 2,50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제사, 주문, 이기적인 기복, 또는 고행 등이 성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인과를 무시하거나, 공동체를 무시하는 풍조도 발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풍조가 비록 일부이겠지만 불교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축복의 경>에는 행복을 가져오는 삶과 수행이 무엇인지 재가자에게 설하는 부처님의 진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고통에 진지한 사람만이 행복의 가치를 알고,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받아들입니다. 공부모임에 참석한 한 도반은 <위대한 축복의 경>을 인쇄해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아침저녁 독송할 결심을 했습니다. 초기경전을 읽으면, 부처님의 원음(原音)을 배우는 기쁨을 얻습니다.
(여운 2016.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