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탁마를 하며 공부의 기쁨을 나누시니, 저도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
살면서 좋은 도반과 좋은 법회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럴수록 공부가 바른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합니다. 다음은 얼심히 정진하는 D 도반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한가할 때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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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강의하거나 선을 지도하는 사람 중에 권위의식이 높은 사람이 있습니다. 권위의식은 상하를 구별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선악과 시비를 가리는 태도는 도덕적 명분을 표방하지만, 사변적이며 주관적입니다.
선악과 시비를 판단하는 사변은 과거에 머물러있습니다. 해서 변하는 현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감각을 억압하면 마음이 메마르고 몸은 늘 긴장에 차 있습니다. 권위적인 태도로는 자성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진리나 자성은 대개 관념적이며, 형이상학적입니다. 귄위적인 사람들이 가르치는 깨달음은 결국 논리와 지식을 지향합니다. 다음은 승찬대사의 신심명의 한 구절입니다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으니,
기억할 것이 없고.
텅 비고 밝아 절로 비추니,
애써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일체불유(一切不留)
무가기억(無可記憶)
허명자조(虛明自照)
불로심력(不勞心力)
승찬대사 신심명
만물을 이해하고 관찰하려면, 사변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악과 시비의 태도에서 벗어나 사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느끼면, 감각과 직관이 일어납니다. 감각과 직관은 유연하고 따라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받아들입니다.
선불교에서는 선악과 시비를 내려놓을 것을 가르칩니다. 만법에 대한 시비 판단을 놓으면, 자기 내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성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선(禪)에서 깨달은 본성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도 아니요, 천상의 그 무엇도 아닙니다. 자성(자기의 본성)은 만물의 자연적 본성이니, 자성은 곧 천진 자성입니다. 자성은 청정하여, 피아(彼我)와 생사(生死)에서 멀리벗어나 있습니다.
다음은 석옥청공의 시입니다. 태고보우, 백운경한 등 고려 말의 뛰어난 선승들은 모두 석옥 선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았습니다.
생각을 붙들어 참성품을 구하지만
참은 더 멀어지고,
마음을 기울여 망념을 끊지만
망념은 오히려 많아지네.
도인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우느니,
달은 하늘에 있고 그림자는 물속에 있네.
著意求真真轉遠
(착의구진진전원)
擬心斷妄妄猶多
(의심단망망유다)
道人一種平懷處
(도인일종평회처)
月在青天影在波
(월재청천영재파)
석옥청공
[여운선생님의 글]
이 날 공부를 마치고 저녁식사 후 차마시는 시간에 공덕행님에게 새로운 법명을 선생님께서 주셨습니다.
착할선에 바다해- [선해(善海)]님의 새법명 받으심을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