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법과 등불] 모임을 잘 회향했습니다.
부처님은 생노병사가 무상하고 그 속에 나와 내 것이 없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나아가 세상의 평화와 해탈을 위해 당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으니, 부처님이 얻은 깨달음은 당신만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임을 천명하였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깨달음은 종족과 계급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명한 진리앞에서 인간은 긴 세월을 통해 자신의 안전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불을 섬기며 미래의 안녕을 추구하는 기복의식은 비단 2,500년 전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에 그치지 않고 지금 현재 나의 내면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안전과 복덕을 주리라 믿는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오늘 모임에서는 집착을 일으키는 의식(意識)의 근거에 대해 탐구했습니다. 불을 섬기는 바라드와자의 내면의 의식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함으로써 이러한 의식의 무의식적 활동과정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생명들이 같은 조건에 묶여있는 것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가 얻은 것은 상실로 끝이 납니다. 의식은 오관의 감각을 통하여 얻어지는 쾌락의 상실에 대해 끊임없이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의식의 활동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의식 스스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지적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자아의식(自我意識)입니다. 의식의 자의식활동은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이라면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에서 본다면 자아의식은 심층의식 속에서 형성된 기만적인 지성이지만, 반면 자아의식은 상실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자아의 안전을 지켜주는(지켜 준다고 믿는) 종교에 의지합니다. 기복적인 종교가 긴 역사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아의식을 갑옷과 같다고 했으니, 자아의식은 두려움을 은폐하는 갑옷입니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집착하며 공덕을 기대하고 내 것을 추구하는 바라드와자의 삶은 허위나 독단, 탐욕, 바램, 분노, 슬픔에 묶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부처님은 불을 섬기는 바라드와자에게 삶과 죽음을 관찰하여 그 속에 '나와 내 것'이 없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깨달음과 해탈의 길이라고 법문합니다. 그래서 독단과 허구를 버린 수행자에게 공양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공부한 숫타니파타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에서 부처님은 진실을 추구하는 수행자를 보거든 눈썹을 찡그리며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이해한 수행자는 불이나 물 등을 숭배하는 제사를 통해 미래의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교 수행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과정에서 대중의 외면을 받기 쉬우며 현실적으로는 가난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불교의 수행자가 가난과 대중의 외면을 견뎌낼 용기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