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8일 [법과 등불] 공부를 잘 회향했습니다.
노련하고 학식이 깊은 유행자 싸비야는 다섯 가지 질문을 들고 당시 세상을
풍미하던 여섯 스승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한 대답을
듣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로 부터 모욕과 분노를 당했습니다.
싸비야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매우 심오한 질문입니다.
그는 수행자가 지켜야할 선(善)은 무엇인지, 그리고 수행이란 무엇을 정복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나아가 깨달음이나 해탈은 바라문과 같이 태생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 아니면 어떤 조건에서 얻어지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유행자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하는지 물었습니다.
싸비야의 질문애 대해 여섯 스승들(불교에서는 육사외도라고 합니다) 중
몇 사람은 세상은 오직 물질(지수화풍 등)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선과 악을 부정하였습니다. 어떤 스승은 수행을 인정하더라도 신체적인 고행을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싼자야 밸라티뿟따는 미꾸라지처럼 애매한 논리를
사용하여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기도 하였습니다.
전재성 박사가 지적했듯이,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유물론적 사고나
고행적 경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을 믿음으로
강요하는 수행자나 종교인의 존재도 여전합니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흐름의 공통점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인간의 고통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싸비야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아직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석가족의 성자 고따마 붓다를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탐욕과 분노, 폭력이
일어나는 우리의 마음을 성찰하여, 그 속에서 선과 악을 탐구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선과 넘어야할 악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수행은 해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싸비야는 뛸듯이 기뻐하였습니다.
복을 얻기 위해 제사를 주장하는 바라문이나, 선악의 존재를 거부하는 유물론자,
그리고 궤변가나 고행자들에게서 일찍이 듣지 못한 새로운 진리를 들은 것입니다.
싸비야는 스스로 연륜이 깊은 수행자였지만, 새내기 수행자와 같은 절차를
기꺼이 거치며 부처님의 교단에 출가하였습니다.
다음은 싸비야와 부처님이 나눈 대화의 일부입니다.
[싸비야]
“무엇으로 고귀한 님이 됩니까?
어떻게 행위가 바른 님이 됩니까?
어떻게 유행하는 님이라 이름 붙여집니까?
스승이시여,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세존]
“싸비야여,
모든 번뇌와 감각적인 집착을 끊고, 슬기로운 님은 모태에 들지 않습니다.
세 가지 지각(감각적 쾌락, 분노, 폭력에 대한 지각)을 제거하고
진흙(탐욕과 셩냄과 어리석음)을 털어 버리고,
허구에 이르지 않으면, 그를 고귀한 님이라 부릅니다.
이 세상에서 훌륭한 행위를 성취하고
언제나 착하고 건전하여 가르침을 알고 있으며,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여 성냄이 없는 자,
그를 행위가 바른 님이라 부릅니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옆에서나 가운데에서
괴로움의 과보가 생기는 행위라면, 그것을 피하여 지혜롭게 유행하며,
거짓과 자만뿐만 아니라
탐욕과 성냄과 명색(정신 신체적 욕망)을 끝내고,
목표를 성취하면, 그를 유행하는 님이라 부릅니다.
(숫타니파타, 큰 법문의 품, 싸비야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