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타니파타>를 보면, 부처님의 제자 중에 <쎌라>라는 바라문이 있었습니다.
쎌라는 부처님 당시 베다의 대 학자이었으며, 그의 제자 중 <께니야>는 빔비사라왕과
그 부하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대접할 정도로 지위와 재산이 대단했습니다.
깨니야는 후에 부처님과 제자 1,250명 모두를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올렸습니다.
대학자 쎌라 바라문은 수행이 높았음에도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바라문의 교리로서는 사람이 죽어도 참나인 아트만이 있어서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아트만을 깨달아 해탈하거나, 아니면 더 좋은 곳으로 윤회하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의 교리를 따르는 쎌라에게는 죽음이 문제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내려온
바라문 종교의 제사나 주문은 윤회 속의 영혼(아트만)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바라문 쎌라가 부처님을 찾은 것은 당장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일어나는 상실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처님은 쎌라 바라문에게 <화살의 경>을 법문했습니다.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삶의 운명은 이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에 패배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지들도 자신들이 아는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가령 사람이 백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고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을 떠나
이 세상의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거룩한 부처님님께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님이라면, 보금자리가 불난 것을 물로 끄듯,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없애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탐욕과 근심 등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 숫타니파타, 큰 법문의 품, 쎌라의 경 (전재성 역)
바라문 쎌라는 아트만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쎌라는 화살의 법문을 듣고 7일이 지나서야 그 뜻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숫타니파타를 읽으며 저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정직했던 쎌라 바라문을 높이 사게 됩니다.
부처님은 늙음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늙음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늙고, 노쇠하고, 쇄약해지고, 백발이 되고,
주름살이지고, 목숨이 줄어들고, 감역이 노화되는데,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이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지는데,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 쌍윳따니까야 제2권 조건의 경, 12:27(3-7) 전재성 역,
<조건의 경>을 보면 부처님은 생노병사를 원인과 조건(인연: 因緣)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것은 곧 연기법(緣紀法)이라고 여러 초기경전에서 일관되게 말씀합니다.
연기법으로 생노병사를 관찰하면 그 속에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은 내가 아니며, 그 속에
내가 없음(無我)을 깨닫게 됩니다. 무아를 깨달아 마침내 수행자는 비탄과 탐욕과 근심을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무상관을 닦으면 생노병사 속에 내가 없는 무아(無我)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불교는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의혹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해탈은 이처럼 철저히 내적 성찰에서 얻어집니다. 불교가 전해지는 곳에서 바라문들은
종교적 권위를 잃고 제사와 주문을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없었으니, 그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모욕을 주었고, 전법(傳法)를 방해하였습니다.
탐욕과 근심을 떠나는 것은 관념적인 인식이 아니며, 마음이 고요하고 의혹이 사라진
실제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상태를 부처님은 <멀리 여읨>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멀리 여읨>으로 거센 번뇌의 물결을 건너라고 법문하였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한 <멀리 여읨(遠離)>의 원리를 물었습니다.
[존자 도따까]
“널리 보는 눈을 가진 님, 싸끼야(석가)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저로 하여금 온갖 의혹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세존]
“도따까여,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의혹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해탈을 시켜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대가 으뜸가는 가르침을 안다면,
그대 스스로 거센 물결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존자 도따까]
“거룩한 님이여, 자비를 베풀어 제가 알고 싶은 '멀리 여읨의 원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마치 허공처럼 평화롭게, 이 세상에서 고요하고
집착 없이 유행하겠습니다.
[세존]
“시간적으로나, 위로 아래로 옆으로 가운데로나,
그대가 인식하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세상에서의 집착이라 알아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마십시오."
- 숫타니파타, 제5품 피안에 이르는 길, <도다까의 장> 전재성 역
부처님은 생노병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혹에 묶여 있는 바라문 도다까에게
비탄 슬픔 탐욕 등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면, 마음이 고요해져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다고
법문했습니다.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당시 수행자들은 대개 바라문 쎌라처럼 영원한 존재를 찾아 헤매거나, 수행의 인과를
거부하는 극단적인 허무(비존재)에 몰입하였습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서 마음 속 깊이
일어나는 의혹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 다음 생(존재)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니면
허무(비존재)한 생각으로 혼란이나 절망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요?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이 오늘 우리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진리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불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속박에서 벗어나는 성찰과 평화의 종교입니다.
부처님을 ‘행복하신 분’이라고 불렀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수행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자신의 수행이 속박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정과
행복을 얻었는지 물어야 합니다. 혹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남이 따를 수 없는 극한적 고행을
자랑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현실에서 벗어난 관념적이거나 신비한 경지를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된 수행은 신비와 현실도피의 길로 이끌며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미망에 떨어집니다.
(여운 2015.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