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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8월19일 [법과 등불] 모임 <두 가지 관찰의 경>을 회향하며,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08.20|조회수24 목록 댓글 0

[법과 등불] 8월 모임을 잘 회향했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두 가지 관찰의 경>을 읽고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에 대해

공부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두 가지로 관찰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괴로움은 집착이 원인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관찰이며,

'집착을 소멸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두 번 쨰 관찰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법문의 핵심인 생성(발생)과 소멸의 가르침입니다.

집착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것을 생성이라고 하고, 집착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지니

소멸입니다. 고집멸도의 진리인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도 이러한 생성과

소멸의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생성과 소멸 두 가지로 사색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무려 16가지의

욕망과 집착으로 폭넓게 분석하여 제자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

뿌리를 내린 번뇌가 깊은 까닭입니다. 16가지의 번뇌의 생성과 소멸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12연기의 초기형태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두 가지 관찰의 경>에 나타난 부처님의 가르침을 볼 때, 연기법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살펴서 고통의 원인을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즉, 12연기를 단순히 순서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집착의 성격을 관찰하고 그 위험과 재난을 성찰해야

올바른 연기법적인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과 집착, 동요와 의착 등이

두려움과 재난인 것을 이해할 때, 스스로 그치고 소멸하는(止滅) 실천적인 행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원인은 소멸된다>는 한 어린 수행자의 게송을 듣고,

당대의 대학자인 싸리뿟다(사리불)는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두 가지 관찰의 경>은 우리에게 연기법이 얼마나 실천적인 수행인지 깨닫게 합니다.

욕망과 집착이 재난인 것을 이해하는 지성은 욕망과 집착을 버리게 되며, 나아가

우리의 존재(오온: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는 <나와 내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연기법은 영원한 신이나 아트만 등 변하지 않는 존재(원인)를 주장하거나,

모든 것을 우연으로만 치부하는 사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신의 지배나

운명을 주장하는 권위주의나, 인과를 거부하는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곳은 원인을

소멸하는 연기법적인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욕망과 집착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도,

재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연기법적인 관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소멸하지 않고 종교나 집단에 속하여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시도도 결국 단체의 내부갈등 앞에서 좌절하기 쉽습니다. 

 

다음은 어제 공부한 <두 가지 관찰의 경>의 마지막 몇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의 총체적 성격을 매우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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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착(依着: 견해 등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떨림이 없다.

그러나 의착이 있는 사람은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집착하며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의착 가운데 커다란 두려움이 있으므로 그 재난을 알아, 수행승이라면, 의착 없이

애착 없이 새김을 확립하고 유행해야 한다. (45, 46)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들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하는 한, 모두가

그들에게 갖고 싶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들은 신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이것들이야말로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고귀한 님들은 존재의 다발(몸)을 소멸시키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본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이것은 정반대이다. (55, 56, 57)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이라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즐거움이라고 안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참사람에게는 열림이 있다. 보는 사람에게 빛이 있는 것처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앞에 있어도 그것을 모른다. (58, 59)

 

존재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히고 존재의 흐름을 추구하며, 악마의 영토에

들어간 자들은 이 진리를 깨닫기 힘들다.

고귀한 님들을 빼놓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올바로 알면, 번뇌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리라. (60, 61)

 

<숫타니파타> 제3장 <큰 법문의 품> 두 가지 관찰의 경, 전재성 역,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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