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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10월 7일 모임 <늙음의 경>과 <띳싸 멧떼이야의 경>에 대한 사색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09.20|조회수51 목록 댓글 0

지난 9월 16일 [법과 등불] 모임을 잘 회향했습니다.

부처님은 사람의 욕망과 집착은 청정한 것을 보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계율을 잘 지키거나 거룩한 맹세를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남에게 자신의 계율과 맹세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한다면, 그를 두고 선한 사람들은 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청정하지 못한 교리를 도모하고 구성하고 선호하면서, 자기 안에서 그 공덕을
본다면, 그야말로 불안정한 평안에 의존하는 것이다.

거룩한 님은 규범과 금계나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인식한 것 가운데
청정함이 있다든가 다른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공덕과 죄악에 더럽혀지지 않고, 얻은 것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짓지 않는다.

- 숫타니파나(전재성 역) 4 여덟게송의 품 제3, 4장 중 일부인용

 

이러한 부처님의 말은 규범이나 금계를 지키며, 청정한 것을 보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당시 인도의 사상가나 수행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극단적인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규범을 잘 지키거나 서원이 높다든지, 또는

청정한 어떤 성품을 보았다면 번뇌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부처님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벌거벗거나 상투를 틀거나 진흙을 바르거나 단식을 하거나

맨땅에 눕거나 먼지와 티끌을 덮거나 웅크리고 정화하여도
그것이 의혹을 넘지 못한 자를 정화하지 못한다. 

- 법구경(담마파다) 제10 폭력의 품
 

한편 오늘 이 시대의 종교나 수행의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부처님의 주장에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을

오래 했거나 계율을 잘 지킨다고 알려진 사람들이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주위에서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비판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정직한 눈으로 볼 때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주장대로 청정한 것을 보았다고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계율을

잘 지키거나 거룩한 서원을 했다고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부처님은 과연

무엇을 통해 욕망과 집착이 사라진다고 가르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로 부처님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고 하여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부처님은 어떻게

욕망과 집착을 이해하였으며 어떻게 그것을 버렸는지 물어야합니다. 이러한 의문은 지난

시간에 공부한 세 가지 경 즉, <사악한 생각>, <청정>, 그리고 <최상>에 대한 여덟 게송의

경을 공부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은 

그 다음 이어지는 제6 <늙음의 경>과 제7 <띳싸 멧떼이야의 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지만,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재가의 삶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으로 그것을 잃게 됩니다.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알고 ‘내 것’이라는 것에 경도되지 말아야 합니다.
- 제6 <늙음의 경>

 

늙음과 즉음을 성찰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의 것>이라는 관념이 헛된 집착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늙음과 죽음 앞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년일 때는 보기 어렵습니다. 

<늙음의 경>을 통해 우리는 청정을 보았다거나 계율과 맹세를 통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넘어설 수 없다고 가르친 부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내 것’이라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온을 보는 성자는 소유를 버리고 유행하는 것입니다.

- 제6 <늙음의 경>


부처님은 <내 것>이라는 탐욕이 걱정 슬픔 인색을 가져오며,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재난이라고 법문합니다. 걱정 슬픈 인색에 갇혀있을 때, 과연 우리는 이 상황을 

재난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이 재난에 빠져있는 현실을 깨달을 때, <내 것>에 대한 탐욕에서 <멀리 여읨>이

일어납니다. <멀리 여읨>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주목을 기울여야할

가르침입니다. <숫타니파타>에는 부처님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을 찾아와

<멀리 여읨>과 <적멸(고요함)>을 묻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존자 도다까] "거룩한 님이여, 자비를 베풀어 제가 알고싶은 <멀리 여읨>의 원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세존] "도다까여, 현세에 전해져 내려온 바가 없는 적멸에 관해 그대에게 말하겠습니다." 

- 숫타니파타, 제5 피안가는 길의 품, 제6 학인 도다까의 질문에 대한 경 

 

멀리 여읨을 배우시오. 이것은 고귀한 님들에게 최상의 일입니다.

감각적 쾌락을 거들떠보지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너 텅 비어 유행하는 성자의 삶을

사는 자를 감각적 쾌락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 숫타니파타, 제4 여덟게송의 품, 제7 <띳싸 멧떼이야의 경>

 

[법과 등불] 10월 7일 모임에서는 <늙음의 경>과 <띳싸 멧떼이야의 경>경을 읽으며,  

부처님이 전하는 <멀리 여읨>과 <적멸>을 공부합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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