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법과 등불]

[법과 등불] 10월 21일 모임 -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등 제8, 9, 10경에 대한 사색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10.14|조회수40 목록 댓글 0

“가난하게 태어났다고 계속 가난해야 할 이유는 없다. 부당함을 참지 말고 편견에 맞서라.

영국은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

 

30년 아웃사이더에서 영국 제1 야당의 대표가 된 제러미 코빈 노동당 당수(66)가 지난 9월 29일

취임 첫 연설에서 한 말입니다. 코빈은 가난과 불평등과 불의를 체념하듯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금수저나 흙수저를 물고 나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 탓이라는 말이지요.

코빈 노동당 당수의 말은 우리가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현실을 되돌아 보게 하는 놀라운 성찰입니다.

 

성찰은 비판적 회의와 깊은 사색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우주의 근본

(브라만과 아트만)을 깨닫는 명상에 집중하거나 고행을 통해 나고 죽는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문을 외우거나 재를 뒤집어 쓰거나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고행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전통적인 명상이나 고행을 부정하고,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는 길만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수행자들에게는 매우 생소하였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집착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집착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논쟁에 대한 집착입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과 소유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지난 10월 7일 

<늙음의 경>과 <띳싸 멧떼이야의 경>을 통해 부처님의 자상한 가르침을 만났습니다.

오는 21일 [법과 등불]모임에서는 다음 세 경을 읽으며, 논쟁에 대한 집착에 대해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합니다.

 

제8.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
제9.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제10.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

 

위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과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을 통해 우리는 논쟁에 대한 집착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성찰하였는지 공부합니다. 논쟁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분열시키며,

분노와 증오 폭력을 부릅니다. 이러한 현실은 2,500여년 전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것만이 청정하다.’고 고집하며, ‘다른 가르침은 청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만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진리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토론을 좋아하여 집회에 뛰어들어 서로 상대방을 어리석은 자라고 여기며,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착하고 건전한 자라고 하면서, 다른 전제 위에 기초해서 논쟁을 일삼습니다.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

 

논쟁에 대한 집착을 연기법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다음 부처님의 법문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집회에서 논쟁에 참가한 사람은 칭찬을 받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패배하면 수치스럽게 여기고,

공격할 것을 찾다가, 비난을 받으면 화를 냅니다. 논쟁의 심판자들이 그가 말한 바에 대해서

‘그대는 패배했다. 논파 당했다.’고 하면, 논쟁에 패배한 자는 비탄해 하고 슬퍼하며,

‘그가 나를 짓밟았다.’고 울부짖습니다. 대중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말하여 그로 인해 칭찬을 받고,

마음속으로 기대한 바대로 이익을 얻으면, 그 때문에 우쭐하여 기뻐합니다. 우쭐하다면, 파멸의 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만하고 교만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아 논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하고 건전한 님은 그것을 청정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 일부 인용>

 

당시 수행자들은 논쟁과 토론으로 누구의 진리가 옳은지 가리면 청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주장대로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논쟁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인간이

청정해질 수 있는지 부처님에게 따졌습니다. 부처님은 적멸이 진정한 자유와 해탈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얻은 해탈, 즉 적멸(고요함, 열반)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문을 외우거나

규범과 금기를 지키거나 고행을 통해야만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 우리 불자에게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적멸(寂滅)에 대한 교리나 용어는 귀에 익지만 그 진정한

뜻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요?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간디야] “성자시여, 사변적 이론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내면의 적멸을

강조하시고 그 의미를 설하는데, 어떻게 현자들이 그것을 설합니까?”

[세존] “마간디야여, 견해나 배움에 의한, 또한 규범과 금계에 의한 청정을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마간디야여, 견해가 없고 배움이 없고 규범과 금계가 없는 청정도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 없이, 고요하여 존재를 갈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간디야] “견해나 배움이나, 또는 규범과 금계에 의한 청정을 말씀하시지 않고, 견해가 없고

배움이 없고 규범과 금계가 없는 청정도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혼미케 하는 가르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는 것에 의해 청정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 일부 인용>

 

마간디야는 논쟁을 거부하며 규범과 금계로 청정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혼란을 가져오는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얻은 고요함(적멸)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적멸은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버릴 때 얻어진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적멸은 시간에 대한 집착을 깊이 성찰할 때 얻어집니다. 

 

[질문자] “어떻게 보고, 어떻게 계행을 지니면, 적멸에 이른 님이라고 합니까?

위없는 님께 묻사오니 고따마시여,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세존] “몸이 부수어지기 전에 갈애를 떠나 과거의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눈앞의 현재에도 기대하지 않아,

그는 선호하는 바가 없습니다. 화내지 않고, 두려워 떨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악행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여 말하고, 거만하지 않으니, 참으로 성자는 말을 삼갑니다. 그는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애달파 하지도 않고, 모든 감각적인 접촉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보아, 견해들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 일부 인용>

 

부처님은 깨달음과 적멸의 기쁨을 누구나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와서 보라고 할 수 있으며,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 알 수도 있다'고 찬탄했습니다.

10월 21일 모임에서는 제8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과 제9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그리고 

제10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을 읽으며, 논쟁의 욕망과 유혹에 대해 사색하고,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

등 시간이 사라진 부처님의 적멸에 대해 함께 탐구합니다. 

(여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