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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11월 4일 모임 - <투쟁과 논쟁의 경>에 대한 사색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10.28|조회수67 목록 댓글 0

대저 토론이나 논쟁의 목적은 진리를 가리기 위해서 입니다. 진리를 가리는 것은

대화나 논쟁을 통해 진리를 확정하며,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이 혼동에서 명징한

인식에 이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명징한 인식은 우리를 번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크게 보면 여섯 사상이 서로 자신의 진리를 주장했으며, 경전에는

64가지의 사상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당시 사상가들 사이에 누구의 이론이 진리인지

활발한 토론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상가들은 우주에 참된 성품(여래)이

있는지, 인과가 성립하는지, 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규범과 금계 등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이러한 토론에 대해 부처님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지난 10월 21일 [법과등불] 모임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입장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사상가들의 학식과 견해, 규범과 금계 등에 대해 그들의 이론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따지는 입장에 서지 않았습니다. 대신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 과연 토론자가

명징한 인식에 이르러 번뇌가 사라졌는지 즉, 청정해졌는지 물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이론의 시비를 따지는 입장이라기보다, 지와 행의 일치, 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여부를

묻는 태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살펴봅니다.

 

집회에서 논쟁에 참가한 사람은 칭찬을 받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패배하면

수치스럽게 여기고,공격할 것을 찾다가, 비난을 받으면 화를 냅니다. 논쟁의 심판자들이

그가 말한 바에 대해서 ‘그대는 패배했다. 논파 당했다.’고 하면, 논쟁에 패배한 자는

비탄해 하고 슬퍼하며, ‘그가 나를 짓밟았다.’고 울부짖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수행자들

사이에 일어나면, 이들 가운데에 득의와 실의가 엇갈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논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을 얻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건전한 님은 그것을 청정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 빠수라에 대한 설법의 경>

 

부처님은 토론자의 현실에서 지와 행,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보았습니다. 

그 원인에 대해 부처님은 논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몇 가지 집착을 보았습니다. 

첫째 논쟁에서의 승리에 대한 집착, 둘째 명예와 칭찬의 이익에 대한 집착, 마지막으로

과거를 후회하며 자기가 주장하는 미래의 당위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러한 집착이 있는 사람은 거짓을 일삼으며,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무모하고,

남을 미워하고 거짓으로 남을 비방합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욕망과 집착을 그친

적멸(고요함)을 주장했습니다.

 

적멸에 이른 님은 몸이 부수어지기 전에 갈애를 떠나 과거의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눈앞의 현재에도 기대하지 않아, 그는 선호하는 바가 없습니다. 화내지 않고,

두려워 떨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악행하지 않으며, 깊이 생각하여 말하고,

거만하지 않으니, 참으로 성자는 말을 삼갑니다. 그는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애달파 하지도 않고, 모든 감각적인 접촉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보아,

견해들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홀로 지내며, 거짓이 없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인색하지 않고, 무모하지 않고, 미움을 받지 않고, 중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현상에 이끌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참으로 고요한 님이라 불립니다.”
<10.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


여기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사색하기를 요구합니다. 즉,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투쟁, 논쟁은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비탄과 슬픔 그리고 인색, 자만과 오만,

그리고 남을 거짓으로 비방하는 마음(중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묻고, 이어서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묻습니다. 즉, 투쟁과 논쟁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든 번뇌를 쉬는 적멸(고요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10.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 다음에 이어지는 제11 <투쟁과 논쟁의 경>

의 주제입니다.  

 

오는 11월 4일 [법과 등불] 모임에서는 <투쟁과 논쟁의 경>을 공부합니다. 이 경에서는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음 두 가지 문제를 탐구합니다. 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질문자] “투쟁, 논쟁은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비탄과 슬픔 그리고 인색, 자만과 오만,

그리고 (남을 모함하는) 중상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여섯 가지 연기에 대한 가르침(연기법)를 설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연기법은 12연기이지만, 여기서는 부처님은 가장 핵심적인 6연기를 설하십니다.

여섯 가지 연기는 다음과 같이 현실적인 고통에서 출발하여 그 원인을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투쟁과 논쟁의 원인은 집착

집착의 원인은 욕망

욕망의 원인은 쾌와 불쾌

쾌와 불쾌의 원인은 접촉

접촉의 원인은 명색(정신과 육체)

 

위의 가르침을 연기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색(정신과 육체) - 촉(감각기관-접촉) - 수(쾌와 불쾌) - 애(욕망) - 취(집착) - 투쟁과 논쟁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까지 말하는 연기법은 순서대로 외우는 것으로는 그 뜻을

충분히 알기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할 때 그 심오함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접촉에서 어떻게 수(受 느낌) 즉 쾌락과 불쾌가 일어나는지, 그리고 느낌(受)에서

어떻게 욕망과 집착이 잇달아 일어나는지 우리의 진지한 내적 성찰이 요구됩니다.
<투쟁과 논쟁의 경>은 마지막으로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질문자] “어떠한 상태에 이른 자에게 물질적 형상(집착의 대상)이 소멸됩니까?

즐거움과 괴로움이 어떻게 소멸되는지 제게 그 소멸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의 집착(쾌락과 소유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소멸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욕망과 집착의 대상을 버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마음을 비운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말처럼 쓰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말도 없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감추거나 은폐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방법과 과정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필요합니다.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우리는 욕망과 집착을 없애는 방법과 과정에 대해 부처님의

심오한 사색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법과 같이 구체적인 원인과 조건을 이해하여

번뇌를 없애지 않고, 단지 청정한 우주적 존재를 깨닫거나 인과를 거부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단지 이론만 있고, 

경험적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이 부처님의 내적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까닭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월 4일 [법과 등불] 모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울삼아

우리의 내적 경험을 함께 성찰하고 탐구하는 좋은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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