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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등불]

[법과 등불] 12월 2일 모임<작은 전열의 경>과 <큰 전열의 경>에 대한 사색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11.24|조회수52 목록 댓글 0

지난 11월 18일 여러 도반들의 진지한 법담 속에 <법과 등불> 모임을

잘 회향하였습니다. 연기법은 예로부터 전해온 것이 아닌, 당신이 스스로

깨우친 것이라고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옛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말은 고대 인도에서 내려온 베다의

사상이나 제사, 목욕, 불의 수행 등에서 말하는 해탈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연기법은 현명한 자라면 스스로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했으니,

연기법은 누구나 사색하면 깨달을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지난 모임에서 연기법의 지적 성격에 대해 법담을 나누었습니다.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인과 결과를 성찰하는 연기법은 지와 행의 일치를 추구하며 신중한 지성이 일어난다.

2) 원인과 조건을 묻는 연기법은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아울러 행동의 주체를

    묻지 않는다. 즉, 고통이 발생하면 원인과 조건을 탐구하지,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3) 연기법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지성이다. 이러한 지성은 방법을 묻는 도구적 지성과 다르다.

4) 연기법을 깊이 사유하면 자신을 불완전하게 여겨 자학하거나 고행을 일삼지 않는다. 

5) 연기법에 대한 사색을 통해 쾌락과 불쾌를 수반하는 맹목적인 당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연기법은 일반적으로 12연기가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공부한 <투쟁과 논쟁의 경>에서

부처님이 설법한 연기는 다음 여섯 가지입니다.

 

투쟁과 논쟁의 원인은 집착
집착의 원인은 욕망
욕망의 원인은 쾌와 불쾌
쾌와 불쾌의 원인은 접촉
접촉의 원인은 명색(정신과 육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은 우리의 고통에 대한 진지한 탐구입니다.

투쟁은 탐욕, 오만 교만, 승리에 대한 집착을 낳으며, 반대로 싸움에 진 자에게는

분노 슬픔, 고통, 절망, 비탄을 가져옵니다. 투쟁과 논쟁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일어나며, 집착이 사라지면 투쟁과 논쟁은 소멸합니다. 마찬가지로 쾌와 불쾌는

접촉에서 일어나고, 접촉이 사라지면 쾌와 불쾌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고통에 진지하다면 접촉과 욕망과 집착을 없애는 길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부처님은 <멀리 여읨>과

<적멸(고요함)>을 스스로 얻고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깨달음과 해탈의 진리를 전했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묻는 사유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보다 쾌락과 불쾌입니다.

쾌락과 불쾌는 모든 논쟁이 피할 수 없는 함정이니, 논쟁을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승패와 희비가 남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논쟁 속에는

승리와 자만에 대한 쾌락과 패배와 절망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인간이 깨달음과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쾌락의 유혹에 숨어 있는

위험을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했습니다. 위험을 인식하면

멈춤(止)과 멀리 여읨(出離)이 일어납니다.

욕망과 집착이 멈추고 소멸하는 과정을 경험하면, 고통은 원인과 조건으로

일어나며,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지는 연기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12월 2일 <법과 등불>모임에는 <투쟁과 논쟁의 경> 다음에 이어지는

<작은 전열의 경>과 <큰 전열의 경>을 공부합니다. 전열은 곧 싸움하는

대열(패거리)을 뜻합니다. 부처님이 투쟁과 논쟁을 이토록 강조한 까닭은 

삶의 고통이 싸움에서 온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은 아닌지요?

이 두 경전에서 우리는 승리에 대한 유혹과 패배에 대한 두려움, 칭찬과 경멸,

독단과 허구 등 우리 삶의 고통에 대한 심오한 부처님의 사색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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