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마지막 일요일입니다. 날은 종일 쌀쌀했습니다.
저녁 8시가 가까워지면서 어두운 굴다리 벽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거사님들의 옷은 대부분 아직 검은 파카 그대로 입니다.
한 쪽에 차를 대고 시간을 기다리는데 미소거사님이 지팡이 두 개에 몸을
의지하며 힘겹게 굴다리를 향해 걸어 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번 일요일 따비에
보이지 않아 인사를 했더니, 지하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다 깜박 잠이 들어
시간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사님은 무료하면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인천이나 천안까지 갔다 온다고 합니다.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는 삶은 고통 가운데서도 큰 고통입니다.
나치의 독가스실에서 살아남은 유태인들의 삶을 기록한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아무리 고통이 다가와도 살아야할 의미를 가진 사람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지팡이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는 미소거사님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요.
어느 추운 겨울 날, 어떻게 이 심한 추위를 견디느냐고 물었더니, 거사님은
'추우면 추운가 보다' 하고 지낸다고 했습니다. 웃으며 말했지만, 힘든
삶속에서도 자신을 지켜가는 그 분의 자존심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생명(生命)이라고 합니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자연의 명령이라는 뜻이지요. 사람이 이 세상에 목숨을
얻어 태어난 이상, 살아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삶도 명령이지만, 죽음도 명령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도 반기지 말고, 숨이 다해도 붙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은 그 명령이 인간의 의식을 넘어선 곳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영역이 바로 생명의 기운 속에서 일어나니
참으로 신비합니다. 노자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활동하는 그 속을 감감하고
또 감감하다(玄之又玄)고 했습니다. 그 속은 의미가 전해지는 영역이 아니라,
오직 절대적인 무념(無念)의 활동영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절대적 생멸(生滅)의 영역 앞에서 생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오늘은 평소보다 거사님들이 적었습니다. 대략 70여분이 오셨습니다.
퇴현 전재성 박사와 거사봉사대의 해룡, 병순, 종문거사님이 보살행을 해주셨습니다.
제영법사가 만든 둥굴레차가 맛이 좋아 병을 가지고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바나나 300개, 백설기 250개, 커피와 둥굴레차 각각 100여잔을 보시했습니다.
봉사하는 거사님들에게는 수요일 만든 반찬을 보시했습니다.
거사님들과 우리 모두 무심한 가운데 오늘 따비를 잘 회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