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날이 쌀쌀하더니 어제부터는 다시 덥습니다. 저녁 을지로 굴다리에도 더운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추석이 다음 주라 해도 이제는 제법 일찍 저뭅니다. 8시에 도착하면 을지로 거리는 벌써 어둡습니다. 그래도 청계천에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들의 옷차림은 아직 반팔입니다.
오늘도 거사님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과일과 떡을 나누며 세어보니 110명 쯤 되었습니다. 얼굴이 대부분 익은 사람들이라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굴다리지만 이 순간만은 사람의 목소리가 공간을 따뜻하게 채웁니다. 오늘은 퇴현 전재성박사와 거사봉사대의 해룡님, 병순님 그리고 종문님이 보살행을 해주셨습니다. 정식씨는 한 쪽에서 잠이 들어 있네요. 옆으로 누운 쪽으로 보이는 뺨과 목에 야윈 티가 많이 납니다.
오늘 보시한 음식은 바나나 280개, 백설기 250쪽, 냉 둥굴레차와 커피 각각 100여잔입니다. 둥굴레차는 여름에는 얼음을 두 덩이를 넣었습니다. 제영법사는 낮에 둥굴레차 통에 얼음 한 덩이만 넣었는데, 저녁에 날이 더워 다시 한 덩이를 더 넣었습니다. 추석이 지나서 따뜻한 차를 준비해야할 것 같습니다.
따비가 끝나고 봉사자끼리 둥굴게 모여 합장하면서 서로의 마음 속에 신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는 배경이나 살아온 이력을 잘 모르지만, 이렇게 신뢰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 무주상보시가 주는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서산대사에게는 삼몽사(三夢詞 세 가지 꿈이야기 )라는 시가 있습니다.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하네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나그네여
이 또한 꿈 속의 사람이구나
사람의 마음은 견고하여 참 돌아보기 어렵습니다. 부처님도 탐욕 분노 어리석음(탐진치)을 세 가지 독(삼독)이라고 했습니다. 그 돌아보기 어려운 삼독도 만법을 공(空)하고 꿈 같이 보는 진리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주고 받는 보시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행할 수 있는 것은 만법이 다 공하기 때문입니다. 서산대사의 시처럼, 우리 인생이 한바탕 꿈인 사실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도 편안하게 따비를 회향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 따비를 만들어주신 회원님들과 음식을 받아주신 거사님들께 합장합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