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부터 비가 추적추적 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을지로 가는 길에도 비는 간간이 계속 내렸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대개 거사님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모입니다. 딱히 갈 곳도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이라 비가 오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모입니다. 다행히 비가 내리지만 날이 추워지지 않아 굴다리 안은 잠시라도 공기가 편안했습니다. 오늘 오신 거사님은 대략 110여명입니다. 평소보다 20여 분이 더 오셨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거사님과 보살님도 대 여섯 분입니다. 처음 오신 분들에게는 늦게 와도 백설기 2쪽과 바나나 2개를 드렸습니다. 거사봉사대님들의 배려가 눈에 뜨였습니다.
오늘은 바나나 290개(오늘따라 잔게 많습니다), 백설기 250쪽, 둥굴레차와 커피 각 각 100여 잔을 보시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바나나를 준비한 것은 계절이 가을이라 선택할 수 있는 과일이 많지 않아서 입니다. 바나나는 오늘 오후에 사명당의집에서 운경행님이 두 개씩 포장한 것입니다. 둥굴레차는 인기가 좋습니다. 제영법사는 누가 보면 수지가 크게 맞는 장사인 것처럼 거사님들에게 열심히 둥굴레차를 권했습니다. 오늘은 봉사하신 분은 퇴현 전재성 박사와 거사봉사대의 해룡님, 병순님 그리고 종문님입니다.
거사봉사대님들은 우리에게는 도반이나 다름 없습니다. 저녁 8시 30분 따비를 시작할 때는 언제나 굴다리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차에서 내리면 서로 안부를 물으며 합장합니다. 그리고 따비를 회향하고 나서 서로 헤어질 때도 언제나 가벼운 미소와 합장으로 인사를 하며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을지로에서 10여 년을 함께 봉사하면서도 거의 빠지는 일이 없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이 담담하니, 이 분들의 덕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저의 복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좋은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무주상보시의 가르침이 가져온 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주는 물건에 대해서도 상을 내지 않는 무주상보시는 일체 만법을 공하게 보는 깊은 공성(空性)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무주상보시에 동참하면서 사람의 마음이 담담해지는 도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속이 심오하게 느껴집니다. 처음 <작은손길>을 시작하며 우리의 보시가 무주상보시임을 모르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무주상보시와 그 속에 담긴 공성의 진리는 처음에 가졌던 철학적 교리적 관념과는 달리, 마치 거대한 바위와 같이 다가옵니다. 텅빈 공(空)의 진리에 앉는 것이 마치 단단한 바위에 앉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허공에 방석을 깔고 앉는 기분입니다. 이 모두 불법의 가피이며, 좋은 도반이 함께 한 덕분입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