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불볕더위입니다. 어제는 낮 기온이 31도까지 올라가네요.
다행히 오전에 소나기가 내린 덕으로 오후에는 대기가 맑고 가로수들은 맑고 정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선단체에서 활동하다보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그러다보면, 사람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봉사단체의 대표가 마치 기업의 총수처럼 행세하는 것도 보았고, 명예를 바라다 마침내 집착이 되어
국제적인 상을 받으러 분주하게 다니는 사람을 보기도 했습니다. 종교인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기업체나 정부의
‘영세민 돕기’와는 근본이 다릅니다. 기업체나 정부는 실적이 중요할지 몰라도 종교인의 자선은 무엇보다
자신을 비우는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은 거창하게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우리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이 텅 비어있음을 가르치는 불교는 자아를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봉사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미망은 도덕적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이 아닐까요?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한상봉님(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의 글을 읽었습니다.
빈민촌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헌신적으로 살던 마누엘 신부는 어느 날 스스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사제가 아니었어도 이처럼 살았을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어도 이렇게 살았을까? 만일 복음서에서 예수가 명령했기 때문에
내가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나의 투신과 신앙은 불순하다’
이렇게 사색한 그는 마침내 사제복을 벗고, 그리스도교 신앙마저 포기한 채 무신론자로서 남은 생애를 빈민촌에서 살았습니다.
마누엘 신부는 죽기 전에 이런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무신론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누엘 신부의 삶을 보면 그 분의 겸손한 비움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마누엘 신부는 사제직 자체가 장애라고 생각하기보다, 사제직에게 주어지는 대접이나 도덕적 정당성이
이웃과 진정한 교류를 막는 장애임을 깨달은 분이 아닐까요? 마누엘 신부는 비록 세상의 칭송과 사제직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권위를 버렸지만, 대신 스스로 자유로움을 얻었고, 이웃과는 진정한 교류의 기쁨을 나누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유마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마거사는 재가불자입니다.
유마경 보살품에는 지세보살이 등장합니다. 지세보살은 중생을 위해 보살행을 실천하는 출가자입니다.
하루는 마왕이 지세보살을 유혹하기 위해 제석천(하늘의 천신)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왕은 지세보살을 칭송하며 자신이 거느리는 여자들을 보낼테니 시녀로 삼아 좋은 일을 많이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자 지세보살은 자신은 출가자이므로 여자들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이때 유마거사가 나타나서 마왕에게 자신이 그 여자들을 거두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왕의 여자들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설법합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즐거움,
자신과 다른 입장에 놓인 사람에게 미움이나 노여움을 품지 않는 즐거움,
좋은 벗을 사귀는 즐거움, 나쁜 친구의 악행을 고쳐 주는 즐거움,
진리를 흠모하여 큰 기쁨을 얻는 즐거움, 방편에 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는 즐거움,
그리고 깨달음의 길을 배우는 가운데 쉽사리 방종에 빠지지 않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모든 보살이 누리기를 원하는 법의 즐거움입니다.”
(유마경 보살품 지세보살편, 박용길역 민족사)
사람과 사람사이의 교류가 끊긴 곳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즐거움이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도덕적 정당성은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되지만, 때로는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는 권위의 허상이 되기도 합니다.
유마거사는 지세보살에게 여자를 멀리하는 계율의식이 도리어 중생을 외면하는 모순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율마저 내려놓으라는 유마거사의 천둥같은 법문은 진정한 수행자의 길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 속에는 일체 존재의 실상은 모두 무아(無我)이며 공(空)인 심오한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나를 내려놓은 수행의 가치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如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