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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손길] 편지

작은손길(사명당의집) 3월 활동보고를 드리며,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04.08|조회수28 목록 댓글 0

회원님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작년 10월부터 가까운 회원들과 함께 <숫타니파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불교경전이 참 많고 다양하지만, 이 <숫타니파타>는 그 중에서도 성립연대가 가장 오래된 경전입니다.
그래서 경전의 내용이 소박하고 당시 신흥종교였던 불교의 상황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숫타니파타 중 제3 <큰 법문의 품>에서 6번째로 나오는 '싸비야의 경'을 읽으며, 싸비야라는
한 인간을 만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싸비야는 유행자의 한 사람입니다. (유행자란 기존 바라문종교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상을 탐구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을 사문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전통종교가들인 바라문들은 전쟁의 승리를 비는 제사를 지내주고
그 대가로 개인적인 부를 늘였으며, 재앙을 피한다고 주문을 제작하여 왕이나 귀족에게 팔았습니다.
이러한 타락과 위선을 거부하며 나타난 사람들이 유행자입니다.

 

부처님 당시 세상에는 막칼리 고쌀라, 싼자야 벨라티뿟따 등 여섯 명의 대 사상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유형별로 크게 나누면 유물론자, 숙명론자, 궤변론자, 그리고 고행자입니다. 여기에 비해 부처님은
아직 세상에 나온 지 일천한 그야말로 새내기 스승이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인간의 근본이 땅 물 불 등의 물질일 뿐이며, 그 속에는 영혼(아트만)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여도 죄가 없으며, 기존 종교(바라문)에서 주장하는 선과 악, 윤회를 부정했습니다.
숙명론은 인간의 운명은 이미 내적으로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수행이나 선행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궤변론자들은 논리적 상대주의를 주장하여, 윤회나 선과 악의 논의 자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뱀장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논의자체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제가 보기에는, 당시 보수 바라문 종교의 타락과 허위를 넘어서려는 진보적인 사상가들입니다. 

 

싸비야는 여섯 명의 스승을 만나 다섯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바라문과 유행자의 진정한 의미를 물었으며, 사상이나 수행에 있어서 고귀한 행위, 즉 진정한 선(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스승들은 싸비야에게 분노를 표하며 심지어 모욕을 주었습니다.
실망한 싸비야는 마침내 세속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당시 알려지지 않고 아직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따마(부처님의 이름입니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먼 길을 떠납니다.

먼 길을 찾아온 싸비야에게 부처님은 싸비야의 질문을 존중하며 여섯 질문에 대해 전혀 새로운 답을 합니다.
유물론자, 숙명론자, 궤변론자가 선악에 대해 외면한 것과는 달리, 부처님은 선과 악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에 일어나는 탐욕과 분노를 악으로, 그리고 탐욕과 분노를 버리는 행위를 선으로 가르치며
새로운 의미의 선과 악을 제시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은 마음입니다.

 

모든 일은 마음이 앞서고, 마음이 중요하며, 마음이 이룬다.
선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따른다.
증오는 증오로 가라앉지 않는다. 증오를 여의야 증오가 사라진다.
(법구경 1장 일부 인용)

 

싸비야는 마침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준 젊은 스승에게 귀의를 합니다.
자신은 추종자가 있는 스승의 위상이지만, 다른 초심자와 같이 넉 달을 기다려 승가의 허락을 받고 계를 받았습니다.
싸비야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대한 지식이나 고행, 또는 논리 등을 통해 해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여섯 스승을 만났지만, 모두 증오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싸비야의 경을 읽으며, 오늘 날에도 비슷한 현실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계급과 소유를 평등하게 하면 상부의 의식이 변화된다고 했지만, 정작 공산당 내에서의 과도한 권력투쟁과
무자비한 숙청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적 토대의 변화가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역사를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과학적 지식에 치우쳐 선악의 문제를 외면하고 결과적으로 탐욕과 분노에 무력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논리적 동어반복을 지적하고 윤리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당면하는 삶에 대한 허무나 무의미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 고행은 때로는 열광적인 몰입을 가져오지만, 분노와 탐욕에 여전히 묶여있는

자신에게는 무력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탐욕과 집착을 성찰하는 수행이 고귀한 행위와 해탈을

가져온다고 주장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숫타니파타>를 공부하며 저는 무엇보다 평생 선(善)의 길을 추구한 싸비야라는 한 인간을 만났습니다.
그는 고귀한 길을 추구하여 당대의 여러 스승을 만났으나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싸비야는 선과 해탈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는, 자기보다 젊은 스승에게 귀의했습니다. 싸비야를 발견하는 순간, 저는 2,500여년을 넘어
한 순수한 영혼을 가진 도반을 새로 만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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