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릴 때부터 한적한 나무 밑에서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왕의 아들로서 탐욕과 성냄 폭력 등 세상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였습니다.
인도의 불교학자 암베드카르에 의하면, 왕자 싯다르타는 다른 부족과의 물 전쟁에서
화해를 주장했습니다. 부처님이 속한 무사계급 크샤트리야가 전쟁을 피하는 것은
나라의 금기입니다. 결국 숫도다나 왕을 포함 싯다르타 왕자의 집안 전체가 왕족에서
물러나야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문제가 커지자 부처님은 혼자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결국 출가의 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반에 성을 넘은 것이 아니라,
일가친척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앞에서 집을 떠났습니다.
암베드까르의 견해를 따르면, 부처님은 출가 전에 성 안과 성 밖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분노와 폭력 등 생노병사의 고통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아함경 등 초기경전 일부에서도 부처님은 분노와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느라 출가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을 곰곰이 생각하면, 암베드까르 박사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하게 됩니다.
집을 나선 싯다르타는 먼저 당시 선정으로 유명한 두 큰 스승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였습니다. 이윽고 이 두 스승에게서 선정을 배워
스승과 같은 경지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싯다르타에게 함께 승단을 이끌자고
제의하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두 스승을 모두 떠났습니다.
부처님은 왜 교단을 같이 이끌자고 붙잡는 두 스승을 떠났을까요?
수심이라는 바라문의 딸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부처님이 왜 두 스승을 떠났는지 부처님께
직접 그 사연을 들었습니다. 다음은 경전에 나오는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웃다까 라마뿟따와 알라라 깔라마는 이 심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끝내
교화를 받지 못하고 각각 목숨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세존께서는 그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은 불용처(不用處: 무소유처)에 태어날 것이요,
또 한 사람은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 태어날 것이다.
또 이 두 사람은 거기서 목숨을 마치면, 한 사람은 장차 변두리 나라의 국왕이 되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것이요, 다른 한 사람은 장차 날개 달린
사나운 살쾡이가 될 터인데 다른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목숨을 마치면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증일아함경 제10권 권청품 (요약)
부처님은 놀랍게도 알라라 깔라마는 수행의 업보에 따라 무소유처에 태어난 다음에는,
다시 변두리 국왕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무소유처의 선정을 얻어도 탐욕과 성냄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웃다까 라마뿟따 역시 다음 생에는 사나운 살쾡이가 되어 들짐승과 날짐승을 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또는 지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유상무상처의 선정도, 부처님이 보기에는,
폭력과 살생에서 벗어나는 올바른 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깨달음과 수행이 무엇인지 부처님의 기준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과연 탐욕과 성냄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그리고 남을 깔보고 해치는 마음이
남아 있는지 그 사람의 실제 삶을 보고 나서 판단했던 것입니다. 지와 행이 일치하지 못하면,
아무리 그 종교나 사상의 이념이 위대하더라도 실제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한 종교나 철학은
결국 허위나 위선을 낳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일찌기 당대 바라문들과 고행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러한 지와 행의 괴리를 경험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와 행의 일치에 대한 부처님의 신념은 경전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하루는 마가다국 빠세나디(파사왕)왕과 부처님이 함께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여러 명의 고행자가 옆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수행에 전념하여
겉모습만 보아도 머리를 숙이게 할 만 하였습니다. 이때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에게
저 사람들이 참된 수행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가려 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계율을 지니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청정한가 하는 것은 같이 대화를 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대화를 해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흔들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같이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재난을 만났을 때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논의를 함으로써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에 주의가 깊어야 알지 주의가 깊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알지 우둔하면 알 수 없습니다.”
-쌍윳따니까야(전재성 역) 제3쌍윳따 ‘결발행자의 경’ (요약)
올바른 수행은 겸손과 인내, 성찰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부처님을 명행족(明行足)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明)와 행이 일치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와 행의 괴리는 우리 모두 안고 있는 고통입니다. 오직 자신에게 정직할 때 자신의 위선과
기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겸허하게 지와 행의 괴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지하게 다가옵니다.
(여운 2015.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