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스산합니다. 회원님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언젠가 한 번 말씀드렸듯이, 최지은님은 1970년대 초에 벨기에에 입양된, 지금은 50이 다 되어가는 처자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모국에 올 때마다 가족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지은님은 가족을 만날 때 한국말로 하고 싶어 우리말을 배웠습니다. 보통 입양청년들이 낳아준 부모만 만나고는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다른 태도이지요. 지난 5월에도 한국에 와서 <사명당의집> 2층에 머물며 우리 회원님들과 안동 하회마을과 영주 부석사 등을 다녔습니다.
몇 년 전에는 벨기에로 망명온 탈북자들을 위해 통역 등 자원봉사를 했던 최지은님은 지금은 시리아 난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어제는 페이스북으로 답답한 마음을 보내왔네요. 회원님들께 공개해도 괜찮을 내용이라고 생각하여 아래에 인용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 유럽에 피난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여기 브루셀(Brussels)에도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필수품을 제공하며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세상에는 가는 곳마다 늘 같은 상황이 일어납니다. 인간이 지금보다 더 현명해질 때는 과연 언제일까요?
시리아에서는 정부군과 이슬람극단세력인 IS와 내전이 한창입니다. 2011년 이후 이미 400만 명 이상이 국외로 탈출해 난민 신세가 됐습니다. 인근 유럽국가가 외면하는 상황에서 난민들은 결국 불법적인 경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트럭이나 보트에서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일이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 터키 해변에서 세 살 된 어린 쿠르디가 주검으로 발견되자, 온 세상이 부유한 유럽국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영국도 난민을 받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수천 년의 역사를 거쳐 왔지만, 최지은님의 말대로, 그 긴 역사만큼이나 현명해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사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에 직면합니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화두라고 합니다만,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어야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오히려 이런 질문을 관념적이고 공허한 논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화살이 몸에 박혀 아프다면 먼저 상처를 싸매야지, 화살이 온 곳에 대해 논쟁해서는 상처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당시 존재나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통찰을 통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의 위선을 비난했습니다. 다음에 인용한 경전구절은 부처님의 생각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을 여읜 궁극적인 청정을 나는 본다. 사람의 청정은 본 것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이해해서 그것을 최상으로 알고, 그것을 궁극의 앎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사람이 본 것에 따라 청정해질 수 있다면, 또한 앎으로 괴로움을 버릴 수 있다면, 달리 집착의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로 청정한 것이 된다.
거룩한 님은 규범과 금계(禁戒)나, 본 것이나, 들은 것이나, 인식한 것 가운데 청정함이 있다든가, 또는 다른 것으로부터 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계율이나 지식으로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룩한 님은 허구를 만들지 않고, 선호하지도 않으며, 궁극적인 청정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결박되어 있는 집착의 굴레를 놓아 버리고, 세상에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바라는 바가 없다.
- <숫타니파타> 여덟 게송의 품, 전재성 역, 제4장과 5장, 일부 인용
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것과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묻는 것, 어느 것이 사람을 진정으로 성숙하게 하는 질문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무관심 인색 오만 편견 탐욕 등을 성찰하여 성숙해지는 때가 언제 오겠는지 탄식하는 최지은님의 절박함이 가슴에 오래 남네요.
최지은님의 물음은 특히 존재의 근본을 깨닫는 일에 연연하여 자신의 황폐한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는 오늘 우리 불교수행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