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손길 회원님들께,
추석은 잘 쇠셨는지요? 10월 들어 설악산에 막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고 하여, 저는 오늘 집사람과 함께 곰배령에 다녀왔습니다. 설악산 줄기인 점봉산 곰배령은 완만하고 숲이 깊어 걷기에 그만입니다. 아직 단풍이 덜 들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 가을의 쓸쓸한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는 충분하였습니다. 단풍은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초가 절정일 것 같습니다만, 자연은 언제나 자신의 완벽함을 보여줍니다.
최근 우리 작은손길 회원이자 불교학 교수인 대학 후배가 책을 몇 권 보내주었습니다. 그 중에는 사명당 대사의 문집과 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사명대사 분충서난록>입니다. 서문에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인연이 실려 있었습니다. 사명대사께서 입적한 후에 문집을 낼 때, 법제자인 남붕스님이 대사의 일기를 가져왔습니다. 일기에는 골계도(滑稽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골계(滑稽)는 우스운 이야기, 해학 등의 뜻입니다. 해서 골계도는 '우스운 이야기가 들어있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서문을 쓴 유학자 김중례가 일기를 열어 보니, 뜻밖에도 사명대사께서 임진왜란 중에 왜장 가등청정을 상대로 회담을 벌이면서 쓴 적정의 정탐 및 상소문 등이 주축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중례는 골계도가 제목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사명대사분충서난록>으로 제목을 붙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명대사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은 '대사께서 충성심을 떨쳐 나라의 어려움을 덜어준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선승의 눈으로 보면 골계도이지만, 유학자의 눈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국난을 이겨낸 기록으로 보인 것이지요.
저는 김중례의 서문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일찍이 사명대사의 스승 서산대사는 시 한 수로 역적을 모의한다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시는, 잘 알려져 있듯이, 선승의 눈으로 본 세상사를 읊은 것입니다.
만국의 도성들은 개미굴이요,
천하의 호걸들도 하루살이로다
밝은 달 창문아래 빈 마음으로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 소리 어지러이 들리네
萬國都城如蟻垤(만국도성여의질) 千家豪傑若醯鷄(천가호걸약혜계)
一窓明月淸虛枕(일창명월청허침) 無限松風韻不齊(무한송풍운부제)
어느 박복한 사람이 이 시를 들고 임금에게 총애를 얻으려고 고변한 것이지요. 금강경 마지막 구절에서 부처님은 일체 만법을 꿈이나 환상, 물거품이나 그림자로 보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텅 빈 공(空)으로 보기 때문에 서산대사는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사명당 유정스님은 벼슬로 이끄는 임금의 손길을 사양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분 모두 전란 중에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 일체의 공을 묻지 않은 것입니다.
역사를 볼 때,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공적을 끼쳤으면서도, 이처럼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일은 참으로 드물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오늘 날 세상사나 정치판을 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됩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일도 어렵지만, 일을 마치고 자신의 종적을 감추는 일은 참으로 자유나 해탈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