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이제 달력이 두 장 남았네요. 단풍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연말이 다가오면 늘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되고, 새해를 그리게 되는데요. 새해 여러 희망과 포부는 지난해를 돌아본 만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늘 늘 과거의 반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10월 19일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 강론에서 교회가 돈으로 평온을 주는 보험회사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신자들도 물질적인 부를 갈망하는 것을 마음에 떠올리며 기도하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항상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경고했습니다. 교황은 “재물이 교회에 주는 안전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모든 종류의 탐욕으로부터 떨어지라고 명확하게 가르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자기의 삶에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탐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설교는 제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매우 새로운 강론이었습니다.
저는 교황의 강론을 읽으며, 그 분의 투명한 지성에 공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위세를 더해가는 현실에서 종교도 보험회사처럼 돈을 받고 신자들에게 미래의 안전을 파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래가 그만큼 불안한 탓도 있겠지만, 종교의 지도자나 신도들도 돈의 위력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교황님의 강론은 한 시대의 위선을 폭로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황의 강론은 종교에서 정신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허구를 날카롭게 경책하고 있습니다. 수행과 깨달음을 최고로 여기는 불교도 교황의 이런 비판을 비껴갈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황의 강론을 제 가까운 선배님에게 말씀드렸더니, 그 선배님은 빙그레 웃으며, "보험금 잘 내는 사람을 못 내게 하면 미워하는 사람이 많이 생길 텐데" 라며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변을 걱정했습니다.
부처님도 돈을 주고 미래의 안전을 구하려는 태도를 탐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죽음을 받아들이면 자유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있는 이상 경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죽음이 자아의 종말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명예, 소유, 직업, 가치관 등 한 사람의 자아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소중하거나 또는 피하고 싶은 것이라도 죽음은 이 모든 것과 타협하지 않는 절대의 장벽입니다.
죽음이 자아의 종말이면, 미래에 대한 불안은 죽음 앞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늙음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강조한 부처님은 이런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지만,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으로 그것을 잃게 됩니다. ‘내 것’이라는 것에 탐욕을 부리면,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안온을 보는 성자는 소유를 버리고 유행하는 것입니다.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4 여덟 게송의 품 <늙음의 경>
성자는 갈애를 떠나 과거의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눈앞의 현재에도 기대하지 않아, 선호하는 바가 없습니다. 그는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애달파 하지도 않고,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거만하지도 않으며, 맹신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이익을 바라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이익이 없을지라도 성내지 않습니다. 성자는 평정하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세상을 거닙니다.
- 숫타니파타 제4 여덟 게송의 품 <'몸이 부서지기 전에'의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