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새해가 다시 시작했습니다. 젊었을 때 새해를 맞으면, 한 해 동안 무엇을 할지 이런 저런 목표를 세우곤 했는데, 이 나이가 되니, 앞으로 무엇을 덜 수 있을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고 박경리 선생이 쓴 시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의 시 <옛날의 그 집> 중 마지막 단 인용)
작년부터 몇몇 회원들이 모여 초기경전 숫타니파타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지난 1월 첫 모임에서 공부한 경전은 숫타니파타 제4품 중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입니다. 이 경은 여느 다른 경전과는 달리 부처님 당신이 왜 출가했는지 스스로 고백하는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로부터 공포가 생깁니다. 싸움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잦아드는 물에 있는 물고기처럼 전율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서로 반목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에게 두려움이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 어디나 견고한 것은 없습니다. 어느 방향이든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있을 곳을 찾았지만, (두려움에) 점령되지 않는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혐오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보았습니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 전재성 역
부처님은 당신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생생하게 고백했습니다. - 그들이 끝까지 반목하는 것을 보고 나에게 혐오가 생겼다. - 당시 끝까지 반목하며 폭력을 휘둘렀던 <그들>이 역사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제가 견문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왕궁 안에서의 권력투쟁을 상상할 수 있고, 부처님의 전기를 쓴 암베드 까르가 주장한 것처럼, 부처님이 살던 나라와 다른 나라가 전쟁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폭력이 가져오는 두려움을 스스로 경험한 부처님은 거짓과 교만, 탐욕이 횡행하는 현실에 회의와 혐오를 느끼고 집을 떠났습니다. 전사계급(크샤트리아)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왕자로서 폭력에 동참하여 얻는 부와 권력을 포기한 것입니다.
열반을 구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물질에 애착을 갖지 말고,
교만을 두루 알아서, 폭력을 삼가며 유행해야 합니다.
- <폭력을 휘두르는 자의 경>
출가의 의미를 부처님은 <멀리 여읨>으로 표현했습니다. 멀리 여읨은 염리(厭離), 또는 원리(遠離)라고도 합니다. 폭력적 경향 속에 은폐되어 있는 탐욕과 분노, 오만 등을 멀리 떨어져 성찰하고 버리는 수행이 곧 <멀리 여읨>이니, 이를 통해 마침내 욕망과 집착이 <내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부처님의 <멀리 여읨>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에 진지한 사람에게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러셀 이후 가장 뛰어난 논리학과 언어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유럽의 철강왕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습니다. 빈에 있던 대저택에는 브람스나 말러, 파블로 카잘스, 부르노 발터 등이 찾아와 공연했으며, 저택 곳곳에는 당대 화가들의 작품이나 로댕의 조각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다인은 나이 30세에 유산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릴케와 같은 가난한 예술가와 주위 인척에게 유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평생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30세 초반에는 교사와 정원사로 평범한 삶을 선택했으며, 그 후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을 탐구하며 살았습니다.
존 라빈스는 세계적인 아이스크림 제조업체 베스킨라빈스 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버지 어브 라빈스의 유산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아이스크림을 해로운 음식으로 규정하고, 식생활과 환경, 건강의 연관성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로 활약하며 각종 유제품에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유산을 포기한 대가로 그는 평생 자신의 뜻대로 사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가 쓴 <음식혁명>은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
부처님 또한 왕궁을 떠나 수행자로서 밥을 얻어먹으며 나무밑에서 지냈지만,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열반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법문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형성된 것은 괴멸(壞滅)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부처님의 평생의 가르침이 이 한 마디에 모두 담겨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욕망과 집착으로 형성된 번뇌는 정진을 통해 멈추고 없앨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말하는 정진은 8정도입니다. 멀리 떨어져 고요하게, 자기의 사고, 언어, 행동, 직업(생계) 등에서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여, 폭력과 탐욕과 분노 등 번뇌를 없애는 수행이 팔정도입니다.
새해를 맞으며 지난 60여년을 돌아보니, 제 마음속에 형성된 사고와 정서와 습관 등에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일이 점점 절실해집니다.
(여운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