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들 설 잘 쇠셨습니까? 새해가 어제 같은데 벌써 2월 중순입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은 세월이 정말 화살 같아서인지, 아니면 옛 사람이 말한대로 제 마음이 밖으로 분주하게 다녀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늙고 죽는 것이 사람이 다 바라는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이들어 참 좋다고 느낄 때는 옛 고전을 다시 읽을 때입니다. 젊었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점을 다시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제가 최근에 자주 보는 책 중에는 <돈황본 육조단경>이 있습니다.
<육조단경>은 선종의 제6대 조사인 혜능스님(638-713)의 법문집입니다. 혜능스님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선종에서 선의 진정한 비조로 받드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교종단의 이름이 조계종인 것도 혜능스님이 머물던 산이름이 조계산인데서 따온 것입니다.
혜능은 원래 당나라 때 남쪽 변방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나뭇꾼이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해 일자무식입니다. 청년 혜능은 어느 날 관청에 나무를 배달하다 우연히 관사안에서 누가 금강경을 읽은 소리를 듣고 마음의 눈이 열렸습니다. 경 읽는 사람에게 물어, 혜능은 마침내 기주 황매현 빙모산에서 주석하고 있는 홍인대사를 찾아갑니다.
홍인스님은 초조 달마대사를 시작으로 선종 제5조로 추앙받는 분입니다. 청년 혜능을 본 홍인은 그가 비록 변방에서 온 보잘 것 없는 청년이지만, 이미 심안이 열린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주위의 눈을 의식한 홍인은 혜능을 방아간에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행자가 된 혜능은 여덟 달을 방아찧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한편 홍인에게는 오랜 세월 수행한 제자 신수스님이 있었습니다. 신수는 대중을 지도하는 교수의 지위이자 인격이 고매한 사람으로, 스승 홍인 다음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야기는 흘러서 홍인대사는 어떤 계기로 제자들을 시험해본 뒤, 남몰래 혜능에게 선종 제6조의 지위를 부촉합니다. 그러나 홍인은 장차 신수를 따르는 대중들이 시기하여 해칠 것을 염려하여 혜능을 야밤에 멀리 도망 보냅니다. 그 후 혜능은 20여 년을 숨어살다 세상에 나와서 법을 폅니다. 그 사이 홍인대사가 별세하자, 신수스님은 뒤를 이어 선종 제6조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행이 깊고 인품이 높아 승속의 존경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즉천무후의 초청으로 궁중에서 수년간 머물며 국사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제가 젊어서 육조단경을 읽을 때는 일자무식의 청년 혜능이 오랜 세월 수행한 신수선사를 게송 한 마디로 제압하는 대목에서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들어 보니, 혜능의 일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쫓겨나 궁벽한 곳에서 법을 펴는 혜능의 입장에서는 신수스님이 제6조로 추대되고 세인의 존경을 받는 세상을 과연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이런 저의 관심은 속된 분별에 나온 것이지만, 단경을 곰곰이 읽다보니, 혜능선사의 가르침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단경에 보면, 혜능선사는 수행자의 위선과 오만을 자주 지적하고 있습니다. 좌선의 형태에 집착하는 수행자를 비난하며, 오래 앉아 있는 것은 오히려 몸의 기운을 막히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좌선은 밖으로 명리에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는 공(空)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전의 뜻을 묻는 학인에게는 경에게 묻기보다 먼저 자기자신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혜능의 주장은 기존의 수행방식을 일거에 부정하는 말입니다. 혜능선사는 집착과 망념을 쉬어 무념(無念)이 되면 문득 자기의 본성이 청정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자기본성이 청정한 것을 본 사람은 더 닦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다고 했지요. 혜능에게서 법을 이어받은 제자 중에는 신회대사와 혜충국사가 역사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회스님은 유불도에 깊은 식견을 갖춘 당대의 고승이었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철학자 호적은 신회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사요, 사상가며, 혁명가라고 칭송했습니다. 신회는 스승이 죽은 뒤, 진정한 달마의 6대 조사는 혜능이라고 주장하며, 잊혀져가는 스승을 현창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왕유가 신회스님에게 수행을 하면 해탈할 수 있느냐고 묻자, 신회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중생은 본래 자신의 마음이 깨끗한데, 다시 마음을 일으켜 닦음이 있으면, 이것은 곧 망심(妄心)이라 해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왕유는 신회의 대답을 듣고는 처음 들어보는 법문이라고 크게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혜능의 또 다른 제자 혜충은 당나라 현종 숙종 대종 등 삼대의 왕이 국사로 모실 정도로 승속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혜충국사는 평생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천진하게 살았습니다. 다음은 혜충국사의 시인데, 음미하다 보면, 스승 혜능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白雲淡泞 (백운담영) 흰 구름은 담담하게 떠있고
水注滄溟 (수주창명) 물은 넓은 바다로 흐른다
萬法本閑 (만법본한) 만법은 본래 한가한데
而人自鬧 (이인자뇨) 사람이 스스로 시끄럽구나
일자무식으로 평생 6조의 대우를 받지 못한 혜능은 주위 승단 수행자들의 위선에 남달리 깊은 문제의식과 통찰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요. 그는 누구나 자기의 본성을 보면(見性), 저절로 자기 성품에서 청정한 행이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본성에서 나오는 행은 무심(無心)이므로, 수행의 위 아래를 따지는 차별과 질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낮추며 모든 사람을 공경하면(常下心行 恭敬一切), 곧 위없는 불도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혜능대사는 '너'니 '나'니 하는 차별의 망념을 버리면 스승이 없이도, 그리고 재가자는 집에서도 깨달음(見性)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 사회, 특히 종교에서도 점차 잃어가고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그리고 그 소박한 가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분의 심오한 깨달음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