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님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계절의 여왕 5월에 들어섰습니다. 교외에 나서면 산과 나무는 온통 초록 빛입니다. 가지에 솟아나는 여린 초록잎을 황홀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초록이 뿜어내는 강렬함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7, 8월 녹음은 5월 초록보다 물론 짙고 강하지만, 가을이 다가오면 곧 사라질 징후로 보여서인지 마음이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여린 초록이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은 그 속에서 앞으로 한참 뻗어나갈 기운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5월은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맘 때가 되면 저는 부처님의 삶을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증일아함경 제40권 <구중생거품>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처님이 왕사성 가란다숲 승원에 있었을 때입니다. 한 비구가 병이 심해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보면서 저 혼자서는 잘 일어나지도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곁에서 돌봐주는 비구도 없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부처님을 찾았습니다. 마침내 소문을 들은 부처님은 직접 그 비구를 찾았습니다. 비구의 안부를 물은 뒤, 부처님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난 날 병들기 전에 그대는 병자를 찾아가 문병한 일이 있는가?"
“병자들을 찾아가 문병한 일이 없습니다."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는 당신의 교단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공부가 바르지 못한 것을 짐작한 부처님은 그 병든 비구를 손수 간호하시는데, 경전에 나오는 표현이 하도 사실적이라, 읽는 이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그 때 세존께서 손수 더러운 것들을 치우고 다시 좌구를 까셨다. 손수 비를 들고 더러운 오물을 치우고 다시 자리를 깔아 주셨다. 또 그의 옷을 빨고 병든 비구를 부축해 앉히고 깨끗한 물로 목욕을 시켰다. 그 비구를 목욕시킨 뒤에 평상 위에 앉히고 손수 밥을 먹여주셨다.
부처님은 밥을 다 먹은 비구에게 12연기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제 몸에 집착하면 결국 생로병사에 묶이고 우울 슬픔 고통 번뇌(憂悲苦惱)에 떨어지는 것을 가르치셨지요. 이어 부처님은 대중을 불러모아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출가한 자로서 같은 스승 아래 물과 젖처럼 화합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서로를 보살피지 않는구나. 지금부터는 부디 서로 보살피도록 하라. 병자를 돌보는 것은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부처님의 삶을 생각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가 지나치게 교리중심적이며 관념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의 일생도 탄생 출가 수도 설법 열반 등 도식적이고 형해화(形骸化)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불교가 인간의 종교임에도, 고뇌하는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습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 사유와 선정의 가르침에서 배려와 자비가 나오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민망합니다. 세상에 대한 무관심속에 기복적 종교행위가 만연하며, 현실의 삶을 외면한 자기도취적 수행이 큰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또한 세속의 한계를 밝히고 그 어두운 상처를 치유해야할 수행자들이, 비록 일부이지만, 속세에서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모순과 위선 앞에서 수행의 비전은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든 비구를 간호하며,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비구여, 그대는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직접 그대를 공양하며 조금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 나는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사람을 구해주고, 장님에게는 눈이 되어주며, 모든 병자를 보살펴 준다."
병든 이웃을 찾아간 적이 있는냐고 묻는 부처님의 물음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천둥같은 경책입니다. 우리 역시 위선과 기만의 현실을 지탱하는 무명(無明)의 한 부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외면 당하는 비구를 손수 씻겨주고 밥을 먹여주시고는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게 해주신 부처님,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한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을 생각할수록 5월의 초록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