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해탈을 얻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으니, 인간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많은 이익을 주어 인간과 하늘을 안락하게 하라.”
- 잡아함경 제39권 1096. 승삭경(繩索經)
위 말씀은 부처님의 전도(傳道)선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도 당시 바라문들은 제사를 장엄하게 지내며 현생과 내생의 복을 빌었습니다. 제사에는 수많은 짐승을 죽여 희생을 삼았으며, 바라문들은 제사를 지내준 대가로 땅 마차 노예 여자 집 등의 보시를 받아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서는 외면하였고, 전쟁과 학정으로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이들에게 인색했습니다. 세상을 이끌어야할 종교가 이렇게 제 구실을 못하자 세상은 전쟁과 폭력, 탐욕과 분노 등의 고통에서 혼란을 겪었습니다.
히말라야의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고따마 싯다르타 역시 젊은이로서 당시의 혼란한 현실을 경험하였습니다. 고따마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성문을 나섰습니다. 세상을 이끌어 가는 종교의 위선을 보고 진정한 해탈의 길을 탐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악마와 싸웠다고 경전은 전합니다. 경전을 따라 부처님이 말하는 악마의 실체를 살펴보면, 실상 악마는 바로 당시 바라문 성직자들이나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이 누리는 욕망입니다.
그대(악마)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그대의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 잘못 얻어진 이득과 명예와 칭송과 명성, 그리고 자기를 칭찬하고 타인을 경멸하는 것도 있다.
나무치(악마)여, 이것들이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이 세상에서 침몰하여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계행을 지닌 고귀한 님들이 가야 할 길조차 알지 못한다.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를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 숫타니파타(전재성 역) 제3 큰 법문의 품, 2 <정진의 경>
어느 경전이 이처럼 깨닫기 전 부처님의 고뇌를 절절하고 진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이 세상에서 타락하여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계행을 지닌 고귀한 님들이 가야 할 길조차 알지 못한다.- 고 탄식하는 부처님의 독백 속에서 우리는 한 젊은 지성의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젊은 고따마는 위선, 고집, 이득 명예 칭송 등이 세상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유혹임을 성찰하였고 그 모든 악마를 물리치기로 결단했습니다.
명예와 위선을 버린 고따마는 삶과 죽음을 관찰하여 마침내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무명에서 생로병사의 우울 슬픔 고통 번뇌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인과 조건으로 이어지는 진리(연기법)를 통찰하였습니다. 나아가 모든 행이 무상(無常)하며, 그 속에 내가 없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청년 고따마 부처님은 세상을 다니며,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당신의 깨달음을 전했습니다. 멀리 여읨(遠離)과 적멸을 가르쳤고, 탐욕과 분노를 없애는 자비와 팔정도를 해탈의 길로 제시하였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는 행복과 해탈은 이처럼 철저히 내적 성찰의 길입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인간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이익을 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제사나 주문, 고행을 거부하는 불교가 전해지는 곳에서는 바라문들은 종교적 권위를 잃고 부를 축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모욕을 주었고, 전법(傳法)을 방해하였습니다.
부처님이 목숨을 걸고 정진하면서 물리친 유혹(악마)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일으킵니다. 불교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보편성을 띠는 것은 부처님이 고뇌했던 유혹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장벽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는 여전히 묶여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이 메말라가고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장애와 결박은 무엇인지요?
사람 사이의 장벽은 더불어 사는 기쁨을 막고 마침내 삶의 의미를 잃게 합니다. 그러나 장벽은 이제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으로까지 여겨지는 실정입니다. 자비와 인내, 겸손과 가난 등 종교의 가르침도 이익과 명예의 장벽 앞에서는 철 지난 의미 없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수행의 형태는 옛과 같은데 참사람이 나오지 않고, 장엄한 예식의 장벽 앞에 소박함과 침묵의 가치는 날로 빛을 잃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한 강론에서 교회가 돈으로 평온을 얻으려는 보험회사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황의 지적은 우리 불교에게도 뼈아픈 죽비입니다. 교황은 "상속문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분열되고, 가족끼리 안부조차 묻지 못하면서 미워하게 됐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 형제·자매,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지만, 재물은 이것들을 파괴 한다”며 "이것은 최근에도 가정을 위험하게 만드는 요소이며, 종교 전체의 문제 중 하나다”라고 밝혔습니다.
교황의 강론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통찰이며, 종교의 역활에 대한 진지한 성찰입니다. 저는 이러한 교황의 성찰은 2,500여년 전 한 젊은 수행자 고따마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고통을 바라보며 그 원인과 조건을 물었습니다. 주문과 제사에 의지하던 시절에, 삶과 죽음을 돌아보며 욕망과 집착을 성찰하는 것은 인류의 새벽을 여는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우리 역시, 현실이 장벽으로 다가올 때, 장벽의 원인과 조건은 무엇이며 그것을 소멸시키는 길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장벽은 마음의 무명(無明)이지만, 그 원인을 모색하는 길은 어둠 속을 걷는 것과 같이 진지하고도 겸손한 사색과 성찰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경전의 뜻을 풀이하며 현실을 해석하는 행위와 다릅니다.
고요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쁨과 행복, 나아가 깨달음과 해탈을 가져옵니다.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을 통해 지금 여기 우리의 속박과 장애를 성찰하는 일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선언한 것과 같이, 속박을 벗어나 진리의 기쁨을 누리는 길입니다. 저는 이 길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불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 5월 15일 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