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객사리 석당간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내걸었던 깃발을 ‘당幢’이라 하고, 그 깃발을 매다는 깃대를 ‘당간幢竿’이라 한다.
담양 객사리 석당간은 고려 시대 당간 지주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문화재로, 당간 옆에 세워진 비석에 따르면 큰 바람이 불어 쓰러진 것을 조선 헌종 5년(1839)에 현재의 모습대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당간 높이는 15m이며, 지주支柱의 높이는 2.5m이다.
담양의 지형이 배가 떠다니는 모양이라 풍수지리상 돛대가 필요하여 당간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종대 또는 짐대라고 부른다.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
담양읍에서 순창 가는 길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넓은 평지가 전개되는데 절터의 흔적은 없고 들 가운데에 이 석탑만이 서있다.
탑은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다른 탑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낮아 특이하고, 기단 맨윗돌의 너비가 1층 지붕돌의 너비보다 좁은 것 또한 특이한 양식이다. 탑신은 알맞게 체감되어 안정된 느낌이며, 2층 이상부터는 몸돌을 받치는 두툼한 괴임을 새겨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두껍고 처마는 경사졌으며 네 귀퉁이는 가볍게 들려있다. 또한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어 초창기의 장식적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옛 땅 안에 위치하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부가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높이 3.5m로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창을 뚫었으며 각 창의 양편에 해서(楷書)로 136자의 명문을 적어 놓았다. 1행에서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과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와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다.
명문에 쓰인 용기(龍紀) 3년이란 891년(통일신라 진성여왕 3)에 해당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의 규모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수정
마을 뒤 나지막한 산허리에 유달리 숲이 우거진 곳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독수정원림이다.
무등산으로부터 북쪽을 향하여 뻗어나간 한 지맥이 내와 부딪쳐 구릉을 이룬 곳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왕버들·소나무·참나무·서어나무 등의 거목(巨木)에 둘러싸여 독수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100여년 됨직한 배롱나무·매화나무·살구나무·산수유나무 등의 노거목이 있어 속세를 떠난 느낌이 든다.
고려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北道安撫使兼兵馬元帥)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은 조선이 건국되자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음을 굳게 맹세하여 서울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 숨어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덕 위에 북쪽을 향한 정자를 지어 이른 아침마다 북쪽 개경(開京)을 향하여 울며 절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독수정이라는 이름은 이태백(李太白)의 시 “이제시하인 독수서산아(夷齊是何人獨守西山餓)”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