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문제제기 】
요즘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기사들 중에 ‘청소년’에 대한 내용이 정말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피해자가 청소년’이라는 내용도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아이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걸까요?
“낯선 사람 조심해라!” 가 “차 조심해라” 다음에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젠 “친구조심해라”, “학교에서 조심해라”, “차 조심해라”라는 말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린 성교육시간에 『사람조심』이 아닌 『상황조심』에 대한 강의를 하였습니다. 낯선 사람에 대한 조심을 시키면 되는 줄 알고 조심시켰더니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에게 ‘아는 사람도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어른의 심정을 우리 아이들이 알기는 하는지, 천연덕스럽게 묻습니다. “그럼, 누굴 믿어야 하나요?”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시했습니다. “어떤 사람과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낯선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위험하다’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에 놓인 것이라면, 그때 너는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한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그들이 살고 있는 방식에 정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른으로서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주고, 그들에게 세상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 잘못된 것일까요? 지금 어른이 된 우리의 청소년 시절에 어른들이 ‘요즘 애들 버릇없어’라고 하셨지요. 우리도 지금의 청소년을 보며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혹 우리가 버릇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소수 아이들의 모습이 아니라 다수의 모습이라면 우리 어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어른이 뭉뚱그려서 본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에 대해 청소년 그들의 문화라고 한다면 우리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걸까요? 우리 어른들이 꾸지람으로 가르치는 아이들만의 자칭 문화 속에서 아이 하나가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8일 후에 어른이 어른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잘못한 아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어른이 어른에게 용서를 빌고 어른이 어른을 원망하는 세상입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는 걸까요?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법정에서 다투면 됩니다. 그러나 없어진 생명에 대해서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쓰라린 가슴의 고통은 누가 제대로 알아주고 쓸어줄 수 있을까요? 갑자기 사라져버린 친구에 대해 커다란 애정을 품진 않았을지라도 그 친구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수의 아이들은 어떤 마음의 상태일까요? 한 학급에서 한 사람이 전학을 가도 눈물로 얼룩지는 교실 안인데, 영영 볼 수 없다고 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피부에 와 닿는 만큼만 느낀다면, 나중에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때에 우리의 아이들이 별 일 없이 별 탈 없이 자라난 것이라고 믿어도 되는 걸까요?
학급에서, 수업시간에 펼쳐지는 상황은 ‘교권’이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수선한 학급분위기에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 조용히 시키고자 하지만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수업시간이니 수업을 학생들이 다 들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런 분위기로는 수업을 계속 진행하기도 어렵고 또한 수업을 듣고자 하는 아이가 방해 없이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없기에 단호하게 표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수업을 들을 친구는 자리에 있고 듣기 싫은 친구는 밖으로 나가라”라고 했답니다. 수업 받을 준비가 안 된 아이들에게 준비를 시키고 수업을 진행하면 정말 좋겠지만, 수업종이 친 다음부터는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걸까요?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지만, 준비가 된 학생들은 얼마나 ‘희생’을 더해야 하는 걸까요? 조연으로 밀려난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과 떠드는 것으로 수업분위기를 흐리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계신 부모님들께서는 우리 아이가 어디에 속해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아이가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주는 것으로 됐다라고 생각하신다면 어떤 모습이 밝은 모습이고 건강한 모습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반에서 ‘지나치게’ 밝은 아이가 대답했답니다. “저는요. 수업듣기 싫은데요. 나가기 싫어요. 제 자리에서 떠들건데요.” 학급의 분위기는 이 말이 나오기 까지는 괜찮았다고 합니다. ‘나가서 놀까? 선생님이 나가도 된다고 했어~ 제약 안주신데~ 갈까?’ 하는 분위기와 ‘난 수업을 들을거야’라는 두 분위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아이의 이야기에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얀 도화지에 점 하나를 찍으면 잘 보입니다. 점이 이미 무수히 많이 찍힌 곳에 점을 찍으면 어떤 것이 새 점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점을 찍은 사람만이 알겠지요. ‘여기에 새 점을 찍었어’라고 말입니다. 성교육 시간에 아이들에게 ‘性’에 대해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공부와 연관된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다. 시험에 대비시키며, 특히 수학과 관련하여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性에 대해서는 연습이란 없다. 모든 것이 다 실전이다.”라고 말입니다. 정보를 습득하는 것과 정보를 분류하여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 그리고 성에 대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생애주기에 해당하는 실전이 되는 것입니다. 몽정의 시작이든 생리의 시작이든 연습이란 없습니다. 처음에 대한 준비를 시키는 것이 성교육이며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과 같이 어색함을 줄이고 익숙함을 갖게 하기 위한 교육이 바로 성교육인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가장 잘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성교육으로, 학교 공부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정보를 쌓고 잘 분류하고 쌓인 지식을 제때 꺼내는 것이 자신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실행하는 곳이 바로 학교 교실 안입니다. 교실 안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무수히 많은 일이 아이들의 머리에 점으로 찍히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지역 전체가 필요하다고 하는 말처럼 아이 한 명이 크는데 많은 어른들의 눈길과 손길이 필요한 것처럼, 같이 자라나는 동년배들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동년배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우리 어른이 나서서 살펴보고 아이에게 꾸지람을 해야 하고 그 말귀를 알아먹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선택권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 아이를 보면 선생님께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야 겠다고 낸 용기가 기특하고 가상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한 상대와의 ‘관계’를 고려한 답을 찾아내야 함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이 ‘개성’이 아닙니다. 상대와 소통하는데 있어 ‘관계’를 고려한 말과 행동을 하는 방법이 독특한 인상을 주는 것이 개성인 것입니다. 우리아이가 개성이 있고 자기주장도 할 줄 알고 씩씩한 것이 아니라 ‘버르장머리가 없고’ ‘관계를 고려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부모들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역에서, 주변에서 두 가지를 전해준다면 한 번 고민해 주세요. 우리 아이가 ‘관계’를 고려하고 염두에 두고 있는지 말입니다. ‘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람은 어른 아이를 떠나 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낯선 사람과 아는 사람에 대한 애매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조심한다면, 낯선 사람과도 웃으며 지나칠 수 있고 아는 사람과는 관계가 돈독해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 없이 혼자서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하며 관계 형성에 노력하기보다 그저 상대하게 우월한 위치를 독점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폭력을 사용하게 되며 동년배를 동등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말을 지지해줄 사람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남자아이들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에 의해 경쟁심리가 생겨 서열에 관심을 갖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며 결국엔 마초적인 성향을 드러낸 아이가 동년배들 사이에서 우월함을 느끼고 군림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교폭력에 대해 ‘설명’을 하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이해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기에는 ‘미성숙한 관계형성’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생명이 너무나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 학창시설만 잘 보내면, 자신이 살고자 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나게 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이 세상을 누릴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고자 우리 어른들이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는데, 어떤 아이를 나무라고 어떤 아이를 감싸시겠습니까?
선택권과 벗어난 말을 한 “저는요. 수업듣기 싫은데요. 나가기 싫어요. 제 자리에서 떠들건데요.” 아이로 인해 반은 싸해졌고, 그 아이에 대해 뭐라 거드는 아이도 없었지만, 그 아이로 인해 선택권은 없었던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보니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여겼고, 그 아이로 인해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라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하게 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선택권을 제시한 것은 수업을 하기 위함인데 그 아이는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겠다는 이야기로 선생님 심기를 거슬렀으니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다른 아이들이 판단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한 아이의 행동에 여러 명이 깨닫게 되었으니 참 잘 된 일일까요? 그 아이는 싸해진 반 분위기를 보며 정말 어떤 감정을 소유했을까요? ‘창피하다’, ‘부끄럽다’ 였을지 ‘역시 내가 말하는 것은 다 통해’ 였을지 전달받으며 심히 걱정되었습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로워했을 그 아이의 심정을 공감하려니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오죽했을 그 마음을 이제라도 짚어보지만, 살아 있을 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주변에서 “무슨 일 있냐? 왜 그러냐” 물어올 때 아이들은 자존심 때문에 알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말을 주변에서 건 낼 만큼 나름의 기지로 알아봐 주길 얼마나 많이 시도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