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친절 vs. 무관심 】
외국에 나갔다오면 아이들의 행동에 변화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보고 듣고 느낀 즉, 체험한 것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아이들이 외국에서 무엇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것일까요? 무엇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여행으로 잠시 다녀왔든 공부를 하러 오랜 기간 머물다 왔든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 반 근심 반의 우려가 되는 마음도 있다고 보입니다. 행여 엉뚱한 것을 보고 들으며 익히게 될까 나중에 외국에 데리고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되진 않을까 라며 말입니다. 이는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게 될 때를 우려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대해 지금부터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친절한 것 같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절대 모른 척 하지 않고 반응을 보입니다. 행여 시야를 가리거나 진로를 방해하게 된 상황에 놓였을 때 역시나 반응을 보이는데 초지일관 ‘미안함’을 보입니다. 오히려 욕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해 보입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말을 걸어줍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하냐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친절해 보입니까? 이것들이 왜 친절해 보이는지는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옷깃을 스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위축되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하면서 일단 자신의 미안함을 전하기보다는 거의 욕을 입 밖으로 뱉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처럼 야리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봅니다. 여기서 참으로 신기한 것이 욕먹을 짓을 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시선을 이미 회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을 뱉을 기회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가 다른 나라를 갔더니, 다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내가 길을 몰라 헤매며 두리번거리다 부딪혔는데도 이런 내게 미안하다고 하니, 정말 친절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요? 두 번 세 번 생각해 보니, 그들은 두리번거리는 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길만을 가려고한 그 순간의 자신에 대해 ‘아차’하는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일례로,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수년간 공부하다가 귀국한 유학생이 한국 백화점 정문에서 머리를 찧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랜만의 귀국에, 한국 사람들의 ‘빨리빨리’에 적응하지 못한 서툰 모습이 어색하여 본인도 모르게 서두르다가 백화점 문을 잡지 않았더니 그만 머리를 “꽝”하고 부딪쳤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그러게 문을 잡았어야지.”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 말이 “미국에서는 뒷사람이 문을 잡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고 기다려 주어”라고 말입니다. 아뿔싸… 우리나라 정서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지만 있고, 남을 도와야지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슥 올라왔습니다. 왜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며 꿋꿋이 백화점 정문의 거대한 문을 밀고 나가기만 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욕”을 먹기 때문이겠지요? 그 미국에서 귀국하여 머리를 찧은 아이가 행여 피라도 뚝뚝 흘리고 있으면 그 앞서 나갔던 사람이 뭐라고 했을 것 같나요? 일단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 않은 이상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벌써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뒤따라오던 사람이 그나마 ‘내가 다칠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다’라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무슨 일이냐며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일단 외마디 비명소리로 인해 뒤를 돌아보게 되고 이내 보이길 문 앞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그 유학생의 모습을 발견한 경우에, 문을 앞서 열고 나갔던 사람이 뭐라고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내가 알아서 내 손으로 문 열고 나왔는데)무슨 일이예요? 부딪쳤어요? 아니 왜 학생은 문도하나 못 잡고 쯧쯧 이렇게 다치나? 나원 참 눈은 뒀다 뭐하고? (다른 사람들 들리게 크게 말한다)아니 문을 자기 손으로 밀고 나와야지 그냥 뒤따라 나오면 어떻게 해요?”
물론 문을 나설 때 자기 손으로 문을 잡고 나와야 하는 것은 외국과 우리나라 모두 같습니다. 다만 앞서나간 사람에게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승’을 합니다. 아주 약이 오를 지경입니다. 백화점 문을 한 번이라고 잡아주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밀고 나가고 뒤 따라오던 엄마나 친구를 위해 문을 잡고 있었더니 엄마가 지나가고 친구가 지나가고 나서도 손으로 문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문을 놓을 찰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을 열어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보다는 그리고 당연히 내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기보다는 ‘이때 닷!’하면서 슥 하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수백인 것 같습니다. “나 하나쯤이야~”가 아직도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편승이라고 봅니다. 다른 이를 위해 베푼 친절에 자신을 슥 끼워 넣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존중’ 이 무엇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존중받아본 적이 없으니 존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존중하였다면 그 친절을 따라 똑같이 베푸는 모습을 갖추는 것이 ‘존중’이라는 근원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으로 문을 열고 나온 다음에는 다음 사람도 자기 손으로 문 열고 나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친절한’ 것입니다. 나로 인해 문이 확 제껴졌다가 반동이 있으니 그 사람 손으로 그 속도를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친절함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백화점 정문이 모두 자동문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정말 유혈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혹 누군가는 백화점 정문을 자동문으로 바꾸라하면 되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느냐 누구누구 탓하지 말고 백화점 정문을 바꿔라 할지도 모릅니다. 이도 역시 타당합니다. 그러나 역시 외국에 다녀오고 나니, 외국에서는 편리함도 추구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놓아두는 재치도 가지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비용을 들여 할 수 있으나 지금 것도 아직 쓸만하다는 뜻이겠지요. 사담이지만 백화점 문이 자동으로 바뀌면 지름신이 너무 쉽게 강림하실 것 같으니 육중한 문이 정신이 들게 해주는 장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사담일뿐입니다. 다시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친절인데 우리나라는 ‘나는 내 손으로 문을 열고 잘 나왔다’가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틈에 손이 낄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처럼 보게 되면 유학생이 문 앞에서 딴청을 부린 것이 잘못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사람이 문을 놓기 전에 뒷사람이 문잡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을 놓았을까요?
‘친절하지 않았다’ ‘불친절하다’가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을 하려하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데 왜 뭐라고 하느냐가 아니라, 남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이라 표현한다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된장녀 같은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이야기들의 공통점이 바로 ‘내가 날 위해서 그런 건데 뭐가 어때서’라는 생각에 의한, 다른 이들에게서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친절한 행동이 아니라, 불친절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처럼 지낼 수 있도록 상대를 나처럼 “존중”하는 마음이 먼저여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