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다르다는 것 vs. 말이나 못하면 】
지금 성인이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보호하고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도 예전에는 누군가의 보호와 관심 속에 자란 사람일 것이다. 지금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애를 쓰는 만큼, 그 자신도 어렸을 때에 그 어른의 보호 속에서 잘 크기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의 작품이라고 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처럼, 자식들은 부모의 복사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말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야 제대로 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콩 심은데 다른 콩이 난다’라고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다는 것인지,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부터다.
옛날 옛적에 바닷가에 게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게 부부는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자 했고 앞으로 똑바로 걷기를 바라며 걷는 것을 연습시켰습니다. 그런데 아기 게들이 자꾸 옆으로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진 엄마가 “너희들 도대체 왜 똑바로 걷질 못하는 거니? 이해할 수가 없구나!” 한 숨을 푹 쉬면서 게 엄마가 얘기했습니다. “잘 보렴. 엄마가 시범을 보여줄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역시 게 엄마도 옆으로 걷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모의 헛된 욕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미는 어찌하다가 옆으로 걷는 게에게 앞으로 똑바로 걷길 바라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복사판’인 자식에게 어찌 다르게 살길 요구하게 된 것일까요? 아마도 그건 ‘자신의 부모와 다르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 자식이 ‘남다르다’라는 것보다 더욱 지배적인 생각이, 바로 ‘내가 남다르게 키울 수 있다’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결국 ‘나와 다르게 키울 수 있다’ 이것이 요인이 되어, “콩 심은데 콩이 나서, 다른 콩이 되길 바란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부모의 ‘작품’이 될 아이들이기에 부모의 복사판 임에도 불구하고-어미처럼 걸으면 안 되고 어미 게의 바람대로 걷는 것이 과업이 되어 자라야만 하는 어린 게처럼-, 새로운 독립품이 되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은 부모들의 헛된 욕망에 의한 좌절을 맛보며, 그 부모에게 “복수”를 꿈꾸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 학원을 보내주고, 먹을 것·입을 것을 마련해 주고, 자라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는데, 아이는 부모에게 복수를 꿈꾼다고 합니다. 한 예로,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라고 일러준 것이었는데 그 공부가 엄마 좋으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수능 당일 날 아이는 시험 시작 5분 전에 학교를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붙들고 이유를 물으니, 엄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라고 답했답니다. 이왕 심은 콩, 좀 다른 콩이 되어주면 안 되겠느냐? 부모가 울부짖어도 콩 심은데 콩이 나지 팥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팥이 되면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어린 게들이 그 과업을 달성하여 어미와 같은 모습으로 걷지 않게 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이 다른 콩이 되기를 거부하니, 부모들은 자신의 모습을 먼저 돌아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 입장에서 보았을 때 ‘헛되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말입니다. 여기서 이제 한 가지를 더 꺼내봅니다.
이제 콩 심은 데에 나는 콩이 다른 콩이 되길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럼 원래의 문장으로 돌아가서 ‘콩 심은데 콩 난다’를 제대로 풀어보면, “콩 심은데 (그 콩과 다른) 콩이 난다”라고 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 어미와 다른 꿈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객체라는 것입니다. 어미의 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꿈을 꿀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작품이 되는 그 콩이, 완전히 다른 콩 하나라는 것입니다. 자식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부모역할을 하면서 자식이 ‘나와 다르다’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어미인 자신을 괴롭히려고 말썽을 부리는 것인지, 왜 저렇게 별나게 구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해 안절부절해 하면서 그러다가 그 아이를 때리거나 밀치기라도 했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참 많이 속상해 합니다. 자신이 정말 나쁜 어미라며 말입니다. 눈물이 나고 속상하고 맘이 아프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다음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양육할까’라는 방법에 대한 고민만을 합니다.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된 고민이기에 그 다음번에 찾은 방법도 역시 같은 결과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자신과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부모로서 자신을 자책하지 않고 아이를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나와 다르다에서 생각을 시작해 보면, 아이의 반응에 민감해질 것입니다. ‘왜 저럴까’ 라는 의아함과 속상함이 사라지고 ‘어떻게 저렇게 하게 되었을까?’로 가게 되면서, 아이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라는 이해 하나만으로 아이로부터 편한 입장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르다’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에 대해 꾸지람과 훈육만을 계속하게 된다면, ‘나처럼 될까봐’의 두려움에 휩싸여서는 이전에 내가 한 실수가 아이에게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아이를 구제하기 위한 일념하나로, 도움의 정보를 주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절대자가 되어서 아이들의 모든 것을 구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라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그 성장을 도와야 할 것입니다. 부모인 자신의 맘을 몰라준다고 아이를 다그치고 혼내고 몰아세우는 것보다 아이의 마음을 알려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맞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왜 혼나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엄마가 무서운 표정과 언성으로 말을 하니 사이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말대꾸도 안하고 혼나고만 있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콩 심은데 다른 콩 나길 바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제일 처음 했습니다. 그리고 콩 심은데 다른 콩 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론은 심은 콩과 나는 콩은 다르다로 내렸습니다. 생각하는 방법,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가 서로 정말 다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차이는 나는 콩이 어린 콩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어미인 자신의 생각과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어리다는 것 자체가 심은 콩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성장하며 가져야 하는 것은 존경심과 고마움이지 복수심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무모한 모정과 부모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심정이 어떻게 표현되고 표출되어졌는지 아이의 반응을 보며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