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공감 】
미국 드라마를 보면 범죄수사물이 상당수 있다. 진행되는 내용의 흐름은 범인을 잡는 것으로 모두 동일하지만, 범인을 잡기위해 사용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다. 과학수사를 앞세워 범죄현장에서의 증거물 분석을 통한 것, 연쇄사건의 범인에 대해서는 범죄행태를 분석하여 그 다음 범죄상황을 예측하는 것, 심리분석가를 활용하여 과학적인 분석 자료와 탐문수사의 사각지대를 메꾸어 수사망을 좁혀가는 것, 그리고 옛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 당시에는 미결로 분류되었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다시 수사를 하여 관계를 재조명하는 것 등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꽤나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범인을 잡기위한 단서를 시청자와 공유하는 만큼 이 범죄수사물을 보고 있다 보면 범인들의 잔혹함에 무자비함에 몸서리 처진다. 극의 마지막에는 범인들이 검거되어 벌을 받고 권선징악의 끝을 보게 되어 드라마가 끝이 나면 탈탈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어딘가 불편함이 깃든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간 보아온 범죄수사물에서 피해자인 사람들을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묻지마 범죄의 희생양이었다. 옛날 수사물에서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범인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유산을 노리고 또는 가정불화의 희생양이 되어 의도적으로 아니면 순간적으로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다가 범죄로 연결되는 것이 범죄자의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강요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세상이 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힘의 지배’라는 것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애초에 사회가 남성위주로 운영되어 왔다고 하면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없고, 범죄현장의 대부분을 보면 피해자들이 잘 모르는 범죄자들이 꾸며놓은 또는 범죄를 행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정해놓은 곳에서 범죄행위를 하기에 피해자는 범죄자보다 공간 통제에 대한 힘이 없다고 보여 진다. 결국 범죄자의 의도를 범죄현장을 통해 알아차리게 되고 범죄자는 또 다른 비슷한 곳에서 같은 범죄를 자행하고 수사기관에서 피해유형분류를 통해 범인이 검거되는 것을 보니,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와 범죄자의 관계를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피해자가 호소하고 보여주는 피해에 대해 공감하기가 수월했다. 정말 범죄에 의한 피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범죄피해내용을 통해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 내용을 보며 범죄에 대한 막연한 증오보다 현실에 대해 더욱 관심이 갔다. 가해예방교육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 번 거론한 적이 있다. 교육을 받는 대상자를 잠정적인 가해자로 규정하고 해야 하는 것이기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하기 위해 우린 피해예방교육을 선택 하였다. 그리고 예방교육을 진행하며 교육 대상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다가가기 위해 많이 고민하였다. 참으로 좋은 내용이라고 전문가들이 인정하여도 교육대상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면 보통의 강의가 되어버릴 수 있기에, 현실감이 느껴지는 강의가 청자들에게 가장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 피해자의 느낌과 상황을 공감할 수 있게 한다는 건 어쩌면 과장되고 자극적인 것이 아닌 역시 현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접하게 되는 피해 사실들 중 가장 안타까운 허망한 죽음. 피해자가 발견되는 장소나 발견되어졌을 때의 모습이나 부검대 위에서 피해자가 입은 상처 하나하나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 면 마음이 무척 쓰리다. 매회 에피소드를 통해 생존한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던가를 고민하였다. 가해자들의 인식개선의 필요성, 사회환경 변화의 필요성, 주거지 개선 등등 거국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일부터 조금만 변해도 될 것 같은 많은 묘안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피해자에게 “힘들겠지만, 한 번만 말하면 돼요”라고 말하는 경찰의 말에 우리나라의 시스템을 떠올려 보았고, 성범죄전담수사반의 수사관이 “우리가 도와줄께요”라는 말에 피해자들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보고 그 말을 한 사람의 소속을 신뢰하는 것인지, 단지 그 말에 위안이 된 것인지 하는 고민도 해보았다. 단란하게 사는 가정에 범죄자들이 들어왔다. 모두 목숨을 건졌지만, 가족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아내는 아이가 집에서 만큼은 안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어렸을 땐 서랍마다 자물쇠를 채웠고 집에서 만큼은 아이를 잘 보호하려고 했는데, 우린 그러지 못했다.”라고 가장이 말했다. 아이의 손목에 파랗게 든 멍, 찢어진 입술의 상처, 무너져 내린 일상이 집 안에서 일어난 범죄행위 때문이었다. 왜! 도대체 어디든 범죄 장소가 되는 걸까? 수사관이 범죄자들에게 다그치며 물어보지만, 시원한 대답은 듣게 되어도 의미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범죄수사드라마를 통해 범인이나 범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피해자들의 아픔과 피해자들의 생각을 공감하게 된다면,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수사관들이 피해자를 염두해 두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현장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증거를 모으고, 범인을 잡게 되면 직접 가서 그 사실을 안내하는 것에, 수사관이 또 한 건을 해결했네~ 실력좋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안전함을 느끼고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우선시 한다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묘사가 지나치다 못해 자극적인 수준에 이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우린 아무것도 공감할 수가 없게 되는 것 같다. 필자는 범죄를 묘사할 때 너무나도 온전히 범죄자의 시선으로만 그려내면 무척 자극적으로 보였고, 피해자인 여성은 ‘피해자 유발론’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지 않아서 불편했다. 범죄자에게 캐릭터 부여를 하기 위함이겠지만, 범죄자가 악인이라는 감정을 금방 소유하게끔 여성들은 무척 함부로 대해지고 피해자들이 무기력한 모습에서 구조 되는 것으로만 묘사가 되면, 피해자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 범인을 검거하는데 노력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고, 그저 나쁜놈이니까 공익을 위해 잡는 것으로만 보인다. ‘나쁜놈’을 잡는 것이 아닌, “피해자에게 나쁜 짓”을 한 놈을 잡는 것이 되어 피해자의 안전에 대한 간절함을 공감하는 것에서 수사를 시작한다면 훨씬 현실감이 있어 보일 것 같다. 이런 공감이 확산된다면, 세상이 보다 좋은 쪽으로 움직일 것 같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우선순위가 있는’ 공감이 늘어나야 된다고 본다. 바로 가해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이해에 앞서, 피해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안전에 대한 간절함을 우선으로 하여 공감하기를 해야 된다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