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기다림 】
자동차를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주차를 해야 한다. 주차 공간이 협소하더라도 내 차를 ‘바로’ 주차할 수 있다면 이는 엄청난 행운처럼 느껴진다. 주차 공간이 없어 고생해본 운전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왔으나 차를 델 곳이 없는 경우, 입구에서 다른 차가 나가지 않을까 잠시 기다려 보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다른 곳에 세워보려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적어도 양심이 있는 운전자라고 칭할 수 있겠다. 제대로 주차를 해보려 노력이라도 했으니 말이다. 차에서 내려 일을 봐야하는데 차를 둘 곳이 없으니, 차가 그만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는 애물단지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주차공간에 모두 주차가 되어 있다. 그곳에 일을 잠시 보려온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어떻게 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던가?
주차공간에 차가 다 차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콕 짚어서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응용할 수 있는 내용은 배웠다.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칸마다 모두 사용 중이다. 이럴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게 말이다. 일단 누군가 칸에서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물론 공중도덕에는 어긋나지만 밖의 어딘가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해결을 할 수 도 있다. 이것은 예외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 급하다고 화장실 칸 앞에 가서 볼 일을 보는 사람이 있던가? 이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자동차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나오길 기다려 보는 마음은 애초에 없다. ‘어딘가에 적당히 세울 공간만 있다면’ 하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개인용 휴대전화가 보급이 되어 차 앞에 번호를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것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인지, 이젠 차를 이상하게 세워도 마음들이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뭐, 불편한 누군가가 전화 해 올 때까지는 오케이!’라는 마음인 것 같다. 애초에 누군가의 차를 가로막는다는 것에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주차들을 하고 있다. 일전에 우체국지점에 일을 보러 간적이 있다. 역시 지점 우체국이기에 협소한 주차 공간을 갖고 있었다. 빼곡이 들어차 있는 차들 속에서 필자는 주차 공간을 발견하고 주차를 하였다. 일을 보고 나오는데, 어이없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로 마주보게 주차할 수 있게 되어있는 공간인데, 그 가운데 공간에서 조금 빗겨간 출구 쪽에 누군가가 주차를 하였다! 어떤 일이 발생했겠는가? 아무도 나갈 수가 없었다. 양쪽의 차들이 크락숀을 울렸다. 나와서 차를 빼라고 말이다. 필자의 차는 그 차와 크락숀을 누르는 차가 나가야만 나갈 수 있는 순서였다. 시동을 걸고 있어보니, 허허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5분이 되어가는 것 같다. 크락숀을 어떤 차가 계속 누르고 있다. 참 시끄럽게 들린다. 크락숀을 울리는 운전자도 좀 아쉽다. 너무 당당하게 큰 소음을 내고 있다. 결국 필자가 차에서 내렸다. 세 명의 운전자들이 있었지만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필자뿐이었고 우체국에 들어가 직원에게 차량번호를 얘기하니, 밖의 소동을 알고 있다는 듯 빤한 모습으로 아무런 당혹함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운전자였다. 직원이 차를 빼달라고 하니 “곧 나가요”를 한다. 허허.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를 빼려고 노력해야 하는게 아닐까? 들어온 사람은 나 하나이지만, 밖에서 세 명이나 못 나가고 있는데, 일을 마치고 가려는 우리들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볼 일을 보고 있다. ‘너희도 이런 내 맘 알지 않냐’라는 모습으로 말이다.
서울에 있는 쇼핑센터에는 차를 안 가져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쇼핑한 물건을 싣고 와야 하니 가져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 주차장 입구 주변은 늘어선 차량들이 항상 보인다. 불편을 감수하겠다며 본인이 차를 가져간 것이므로 쇼핑센터 주차장 입구엔 ‘기다리는’ 사람이 참 많다. 자기 순서를 말이다. 사기업에서 운전자를 맞이하는 직원들을 배치하여 운전자가 차에서 내려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이 불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운전자들이 기꺼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주차이야기로 시작을 했지만, 성(性)교육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기다림’이다. 모두가 함께 아는 대로 수행하고 얌체 운전자처럼 요령을 부리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이 ‘기다림’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에 대한 동질감이 무척 큰 결속력을 만들어 준다고 본다. ‘너도 그랬니?’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수행하는 것에는 ‘기다림’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예를 든 내용처럼, 주차할 자리가 없다면과 같은 기준 말이다. 상대와의 관계에서 속도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관계가 틀어짐을 경험을 통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기다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폭력’으로 귀결되고 상대에게 강제한 것에 대해 죗값을 치러야만 한다. 성(性)교육은 자신의 변화를 기다릴 수 있게 돕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을 도와주며, 서로 기다릴 수 있게끔 안내를 해주는 내용이다. 그래서 내용이 예방위주인 것이다. 기다려야 하는 이유에는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있다고 본다. 성교육이 예절교육도 아니고 윤리교육도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을 활용하여 얻고자 하는 효과는 단 하나이다. 바로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것으로 그 시작이 기다림에 있다고 본다. 만약 우체국에서 그 운전자가 이상하게 주차하지 않고 입구에서 기다렸다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까? 그 운전자 다음에 온 사람은 그 차 뒤에서 기다렸을 것이고, 차가 나오는 순서대로 주차를 해결하고 볼일도 역시 순서대로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을 우린 생활에서 익히고 연습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성교육 강사는 안내자이지 절대자가 아니다. 자신의 기준을 확고히 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쇼핑센터 앞에서 묵묵히 신뢰는 주는 주차요원처럼 말이다. 기다림을 익히기 위해서는 평소에 연습을 해야한다. 줄이 있으면 줄에 서서 기다리기, 줄이 없다면 줄을 만들어서 기다리기, 기다릴 곳이 없어 불편하다면 만들어 달라고 하여 기다려야 한다. 내 삶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이 존중되어야 한다. 기다림은 함께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지혜와도 같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