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양육과 생명경시풍조 】
보호를 받아야 되는 대상이 따로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가정폭력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타인에 의한 폭력에 노출되었다면, 이는 가정폭력보다도 더 나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역시 “그렇다”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철저히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누군가 이의제기를 한다고 하여도 필자는 ‘반드시’라고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어른은 아이들을 보호해야지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생각은 배움의 길이와 전무하다고 본다. 그런데 요즘 언론기사를 살펴보면 철저히 완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 아이들을 상대로 펼쳐진 악행이 너무나 많이 보고되어 있다. 교묘하게 자신의 행동에 선을 그어놓고 경계에 서서 해를 끼치고 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우리는 들어줘야 하는가?
왜? 그들은 왜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악행을 펼치는 것일까? 기사를 보고 나면 항상 그 이유가 궁금하다. 해를 끼치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하여 어떤 대안을 세워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이 크게 된다. 무엇 때문일까? 만만하여 화풀이 대상인 걸까? 아니면 악행인지 모르고 한 행동인 걸까? 아니면 악행인 걸 알고 고의적으로 한 것일까? 정말 모두 싸이코패스인 걸까?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고통스러울 거란 것을 몰랐던 걸까? 스트레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실수한 것이란 말이 악행으로 인한 피해가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가늠할 수 없다는 진단과 맞바꿀 수 있는 말일까? 질문을 다시 해보면, 누가 보육교사가 되어야 할까? 누가 새엄마가 되어야 할까? 아니 누가 보육교사가 되면 안 되는 걸까? 누가 새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 걸까?
이런 질문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제야 희생된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잘잘못을 논하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 “아는 사람, 낮선 사람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하지 말고,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하여라.” 성폭력예방교육현장에서 하고 있는 교육내용이다. 누구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상한 느낌이 들면 위기상황이라고 규정하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함을 교육하였다. 위기 상황이라고 인지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절하기”를 가르쳤고, 즉시 상황을 중단시키고 벗어나야 함을 알게 하였다. 결국 이 교안을 통해 “관계”에 대한 고민에 대해서도 해답을 제시해 주었는데, 이 교안은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 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0세부터 1살, 2살 등등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며 하루하루 성장이 남다른 아이들인데, 누군가의 눈에는 이것이 달리 보이나 보다. 자신의 일을 방해하고 귀찮고 짜증나는 그래서 그런 아이에게 이불을 뒤집어 씌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보내버리고 싶어지는가 보다. 도대체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으로 아동의 피해모습을 보고나면 가해자에 대해 응징과 강한 처벌만이 마음속에서 되뇌어지는데, 정말은 한 사람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구조, 우리 사회문제를 먼저 짚어보아야 하는 것 같다. 누가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는가? 하고 말이다. 처벌이 강화되어 그런 악행이 중지되고 그 강화된 처벌이 두려워 그런 사건 및 사고가 없어진다면, 정말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가게 되는 걸까?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필자는 무엇보다도 생명경시풍조가 이 모든 것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다루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기에, 자신의 욕구에 따라 생명이 있는 대상을 이용하는 것을 대수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악플러의 악플로 인한 자살, 학교폭력피해로 인한 자살, 그리고 신상털기 조차도 하나의 고귀하고 존엄한 인간의 생을 거두게 함을 알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생명존중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물에 대해서도 함부로 하지 않은 조상의 미덕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뉴스에서 간간히 동물에게 가해진 잔혹한 행동의 보고를 봐도 우리가 이젠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본다. 약자와 강자로 나누어진 세상으로 많이들 보고 있지만, 필자는 힘의 논리가 아닌 주고받는 베풀음의 논리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본다. 우린 서로가 가진 것을 베풀어야 하고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한다. 복지의 진정한 역할을 가진 것을 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을 주기위한 제도를 세우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했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가진 자가 베풀음으로 인해 받은 자가 후에 돌려주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면, 우린 더 이상 힘의 논리와 정의실현을 앞세워 서로를 경계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우린 최대한으로 베풀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후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되돌려 줄 것이다. 받은 것 이상으로 말이다.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 아님이 바로 베풀음이다. 베푼다는 것은 잘 받을 수 있게 하여 누리게 한다는 것 이므로, 아이들 곁에는 잘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 어른보다 가진 것이 적은 아이들에게 뺏는 것을 하려는 자는 곁에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은 기꺼이 주려할 것이고 주는 것이 익숙한 아이들은 주지 못함에 속상함과 서글픔을 느끼며 이내 위축되어 선, 수동적인 아이가 될 것이다.
걷지도 서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두 팔 벌려 우리를 최대한으로 품어준다. 어른 품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는 없다. 아이들은 늘 자신의 가장 큰 품으로 어른을 품는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클 수 있도록 아이들이 주는 사랑을 어른들은 잘 받고, 그 이상으로 돌려주는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 행가래로 139호>